그림을 그리며 살다 보면 다른 분들께 종종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림 그리고 살아서 참 좋겠다.'는 것이 그것이고 '우리애가 그림을 참 잘그려서 미술학원에 보내고 있다.'는 것인데 이 이야기 속엔 어떻게 지도해야 좋겠습니까 하고 조언을 구하는 속사정이 숨어있게 마련입니다.
저희 사십대만 하더라도 미술학원(그때는 미술학원도 거의 없었지만)은 고사하고 집안에 그림그리는 자식이 태어나면 환쟁이라는 사고방식때문에 무슨사고 칠 놈 하나 태어난 것 같이 막아서고 못 그리게 하곤 하던때라, 돌이켜보면 저는 그림을 그리면서 부모와 끝없는 전쟁을 치룬 기분으로 살아왔던게 사실입니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께서 종로2가의 아카데미 극장 뒷 켠으로 데려 가시더니, '저거 봐라, 너 그림 자꾸 그리면 저렇게 된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마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간판 그리시는 분이 처마밑에서 비에 흠뻑 젖어 배우 얼굴을 열심히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팔자가 환쟁이 팔자라 그랬는지 내 눈에는 그 아저씨의 모습이 뭐라 표현할수없는 예술가의 숙연함 그 자체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아 ! 나도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던 것이죠
동상이몽
돌아오는 길에 아버님과 나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제 세월이 지나 세상이 좋아지다 보니 그때와는 반대로 자식 예술가 못시켜서 환장(?)한 부모가 무지무지하게 많아졌더란
말입니다. 표현이 좀 과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집집마다 피아노 없는 집 없고. 피아노 학원 안 다니는 애들 별로 없고,미술학원 안다니는 애들도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예술교육의 천국이 되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면서도 부모 마음 한켠에는 남에게 뒤지고 기 죽을까 봐 싶어서인지 보내긴 보내는데 국어,영어.수학도 더불어 잘해야 되겠다 싶어서인지 속셈학원이다 조기 영어 교육이다 해서 애들을 학원데서 학원으로 뺑뺑이를 돌려대는데, 속된 말로 죽도 밥도 안되게 돈을 들여가며 자식의 인성을 철저히 망가뜨리고 있는 거죠.
한 반에 사십명이면 보통 열댓 명을 그림 잘 그립니다.
피아노 학원에 몇달 보내면 뚱땅거리고 잘 치긴합니다.
어떤 분은 내가 하도 몰아 붙여대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그거, 어렸을 때 정서교육 삼아 한번 보내는거지 뭐. 대단한 예술가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니예요. 시켜보다 재능이 보이면 계속 밀어줄수있는데 까지 밀어주는 거고 안되면 다른 길을 택하고 그러는거죠'라고.
문제는 그 아이의 정서교육을 위해 피아노 값까지 합쳐서 수백만원을 투자할 능력이 안 되는 집이 많더라는 것이고 무조건 조금 능력이 보여서 밀어주는데 까지 밀어주다가 안되면 다른 길을 택하게 한다니!
우리 애들의 인생이 자동차 바꿔 타듯 그렇게 교육받아서 될 수 있을만큼 시간과 정신이 여유만만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어린이를 상대로 피아노, 미술학원 하시는 선생님들은 정신 독바로 차리고 제 얘기를 들으셔야 합니다.
선생님들이야 학원을 하다가 수지가 안 맞으면 그만 둘수도 있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인생이 최초의 감성적 선택이요,최초의 감성적 충격이요, 또는 감성적 배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표회니 전시회니 해서 가치도 없는 상을 남발하여 어린 가슴에 허영의 바람부터 불어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음악이나 미술의 초기교육은 그것을 통해 인격완성에 보탬을 주고자 하는것에 목적이 있지 인격을 허물어뜨리고 망쳐가면서 예술인인 척하는 쇼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너나 없이 서민의 자녀인 우리 아이들에게 음악과 미술을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수있게 해주고 텅 빈 공간의 소리없음이 또한 소리임을 체험하게 하여 항상 꿈을 잃지 않고 모든 일에 용서와 이해의 힘을 바탕으로 아름답게 살수있는 그런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초기 예술을 통한 감성적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이슬보다도 더맑은 아이들의 가슴에 영업적 탕성에 젖은 예술혼을 물감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음악 미술을 통해 어린이를 지도하시는 선생님들께 정중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새어버렸습니다만, 우선 부모님들도 무조건 학원에 디밀것이 아니고 비 상업적 예술인 예컨대 미대 학생.음대 학생이 아니면 그 분야의 전문가나 담임선생님>을 찾아 뵙고 아이의 적성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여 대화를 나눈 뒤에 미술, 음악학원을 보낼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친구 따라 학원간다고 떼쓰니까,옆집 아이가 가니까 엄벙덤벙 수 십만원 날리지 마시란 얘깁니다. 신년마다 나오는 달력을 보면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아이의 방에 혹은 거실에 화장실에 잘 붙여놓고 늘 감상할수있게 해주고 스케치 북과 크레파스를 들고 공원이라든가 쉼터를 찾아 마음껏 그리고 싶은대로 그리게 하세요.
학원가서 선생님께 배우는걸 좋아할까요. 주말마다 엄마 아빠와 함께 그림그리기를 좋아할까요. 이렇게만 해 줘도 그 아이의 감성은 스스로가 알아서 무럭무럭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음악도 그렇습니다. 아이가 음악에 관심을 보인다 싶으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미 클래식 이라든가 클래식 소품을 가볍게 틀어놓고 하루를 시작하는 겁니다.
영화음악도 좋고요. 음악적 감성 교육이라는게 꼭 피아노 들여 놓고 학원에 보내야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거죠.
늘 생활 속에 함께 하는것이 참 중요하다고 봅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마는 그림도 서양화보다는 최초에 동양적인 것을 접해서 경험하는 것이 좋고 ,음악도 가능하면 우리 것과 병행해서 들려주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언어도 어려서 이민 간 아이가 외국어에는 능통한데 한국말을 다시 가르치려면 아주 힘들어 한다고 하더군요. 반면에 우리말을 어느정도 익숙하게 구사할 때 외국에 간 아이는 두 나라말을 편안하고 막힘없이 구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본면 어려서 예술적 소양을 우리 것으로부터 다듬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술 교육은 전문기술자를 양산하듯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대충대충 돈벌이 목적으로 하는 시간 때우기 식의 교육은 오히려 아이들의 순수한 감성을 좀먹는 위험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이들의 천부적 재능이 부모의 욕심과 학원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슨 교육이 되었던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인것이지 돈주고 사서 주는 사랑과 관심이 우선하는 것은 아니란 얘깁니다.
- 적암 이찬범
작성일: 2000/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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