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어스 시저는 기원전 1세기 로마 사회를 대표하는 군인이요 정치가였습니다. 그의 정치적 지지 기반은 예상밖으로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는 원로원이 아니라 평민·대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저는 늘 평민·대중의 심리와 정서를 등에 업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가장 압권은 아마도 자신의 첫번째 아내에 대한 충성 맹세일 것입니다. 당시 독재자인 술라는 정적인 대중파 지도자들을 가차없이 처형했는데 그중 하나가 킨나이며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가 바로 시저의 아내였습니다. 시저에게 약간의 호감을 갖고 있던 술라는 다른건 불문에 부칠테니 대신 코르넬리아와 이혼하라고 요구합니다.
코르넬리아는 이미 지참금과 가족 유산마저 몰수당한 상태였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에 따라 시저마저 목숨이 위태로울 순간이었죠. 그러나 시저는 술라의 요구를 명백히 거부합니다. 독재자는 끝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만 시저는 이 사건으로 모든 사람 앞에서 대중파의 입지를 구축하는 한편 한 남자로서의 절개를 과시하는 효과까지 거두게 됩니다.
이랬던 그가 두번째 처 폼페이아에게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어떤 남자가 한밤중 폼페이아의 침실로 들어가려다 목격됐다는 소문이 퍼지자 “내 아내라면 잘못이 있든없든 의심받아서는 안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이혼을 선언합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갑자기 아내의 인격보다 자신에게 불리한 소문이 더 중요해진 것일까요.
시저의 두가지 태도는 서로 모순되는 것 아니냐고요? 글쎄요. 그런 면도 있지만 대중조작의 차원에서는 오히려 타당성 있는 행동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대중심리를 끌어당기고 인기를 유지하는게 목적이라면 두개의 상반된 행위는 나름대로 논리적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죠.
뜬금없이 시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각종 사회운동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를 위한 3보1배 시위가 있었습니다. 반대의 명분은 갯벌을 살리자는 것이었습니다. 방조제 건설로 수질오염이 심화되고 결국 갯벌에 사는 게, 조개, 망둥어 등 수많은 생명을 죽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셀 수 없는 생명’이라는 표현도 있더군요. 그러나 이런 표현을 쓸수록 이 시위는 더욱 분명하게 자기 모순을 드러낼 뿐입니다.
예를들어 방조제를 건설하든 하지 않든 동진강과 만경강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환경오염물질은 끊임없이 서해 앞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서해의 ‘셀 수 없는 생명’이 이 순간에도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런데도 서해 앞바다의 생명들은 중요하지 않고 갯벌에 자리잡은 생명체만 중요하다는건가요. 이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일언반구가 없습니다.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공사 반대 시위 역시 감춰진 논리구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도롱뇽이 등장, 고속철 건설 반대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도롱뇽을 살려야 한다면서 어느 스님이 단식투쟁까지 벌이는 바람에 이제 도롱뇽에게는 인간 생명을 걸만한 가치까지 부여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천성산 터널이 우회도로로 대체될 경우 새 도로가 땅을 파헤치고 산을 절단할때 다른 생명은 안전하리라 여겨집니까. 그 산 주변에 사는 맹꽁이, 금개구리, 남생이, 까치살무사 등은 정작 자연환경보존법의 보호대상으로 지정돼 있으면서도 어느날 갑자기 스님 ‘백’을 등에 업고 나타난 도롱뇽 때문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끽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없는 짐승들 역시 우리네 무지랭이들의 인생살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군요.
지금까지 3가지 주제를 전했는데 이 3가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코르넬리아나 폼페이아든, 서해 앞바다의 조개나 망둥어나 새우든, 도롱뇽이나 아니면 맹꽁이, 금개구리든 그들은 모두 실체가 아니라 이미지로서만 대중의 머릿속을 배회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고작 대중조작을 위해 끌려다니는 수단에 불과한 것일까요.
이신우 / 논설위원
기사 게재 일자 200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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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이 무서워요 - 문화일보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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