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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서·태권도·용병·골퍼… 그의 마지막 도전은 탱고 - 공명규

by 202020 2009.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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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규, 그는 왜 불가능과 싸우나
월드컵 우승 아르헨티나 이상향으로 생각해 밀항…

1961년 마포 공덕동을 지나던 전차(電車) 안이었다. 거기서 소년이 부모를 잃었다. 모든 게 혼란했던 시절이었다.
네 살배기는 낯 모르는 어른 손에 끌려 보호소로 갔다. 얼마 뒤 그는 미군 트럭에 실렸다.

이문동 고아원에서 다시 시작된 삶이었다. 그로부터 48년 동안 공명규(孔明奎·52)의 인생은 숨 가쁘게 바뀌었다.
복서에서 태권도 사범, 포클랜드전(戰) 용병(傭兵)에서 골퍼로 변신을 거듭한 것이다.

그의 마지막 승부처는 탱고(Tango)다. 신대륙을 밟은 유럽 이민자들의 애환이 담긴 처절한 몸짓이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피버(Fever) 탱고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50대 남자가 나타났다. 옷을 들춰보니 배 근육이 찰고무 같았다.

대낮 주택가에서 탱고 음악이 들렸다. 그 지하에서 그가 여(女)무용수 사브리나와 호흡을 맞췄다.
영락없는 탈선(脫線)현장 같은 그곳에서 사막 속 신기루를 도심에서 목격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 공명규와 무희(舞姬)가 탱고에 열중하고 있다. 탱고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공명규의 마지막 도전이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외로운 주먹이 부모를 찾습니다

소년은 거친 아이들 사이에서 맞으며 컸다. 먹을 것, 입을 것 없는 시절이었다. 그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게 복싱이었다.
1966년 한국 최초의 프로 복싱 세계챔피언이 된 김기수(金基洙·97년 작고), 그처럼 되는 게 꿈이었다.

공명규는 고아원을 뛰쳐나왔다. 경희대 뒷산에서 아카시아를 따 먹으며 생활하다 이문동 산동네에서 연탄배달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하루 1000장씩 달동네 골목을 뛰어다니는 게 그에겐 훈련이었다.

그때 필생의 은인(恩人) 김사용을 만났다. 김사용은 68년 멕시코 올림픽 국가대표였다.
처음에 그는 라이트급 유망주의 스파링 파트너로 자주 링에 올랐다. 적당히 맞아주고 끝나면 될 일이었다.

‘깡’ 하나에 의지한 공명규의 라이트 스트레이트에는 한(恨)이 서려 있었다. 어느 날 제대로 된 한방으로 같은 체육관의 간판스타가 링 바닥에 벌렁 누웠다. 김사용이 그 광경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속전속결(速戰速決)’, 공명규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경기를 오래하려야 할 수도 없었다.
3라운드 쯤 되면 빈혈(貧血)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고깃국물 한번 먹어보지 못한 가난은 시간이 흐르면 정체를 드러냈다.

그런 그가 복싱을 때려치울 뻔했다. 남들은 번듯한 트레이닝복에 복싱 슈즈를 입었건만,
그는 연탄 돌리며 번 돈으로 그걸 마련해야 했다. 연탄이 묻어 검게 변한 셔츠를 입고 로드웍을 하는 것도 창피했다.

1971년 전국신인복싱선수권대회 개막을 얼마 앞두고 공명규가 잠적했다. 합숙훈련을 하려면 ‘부모 동의서’를 가져와야 한다는 말에 반항심이 생겼다. 갑자기 하늘 아래 외톨이로 살고 있다는 게 뼈저리게 다가왔다.

통금(通禁)이 있던 시절, 남들이 안보는 새벽 2시 로드웍을 하다 도둑으로 몰리기도 했던 그였다.
체육관에서 그를 찾느라 난리가 났을 때 그는 장위동 골목에서 깨진 연탄을 두들기며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 연탄을 배달시킨 아주머니는 그런 공명규가 못마땅했다. “왜 이리 먼지가 많이 날려?”
“연탄은 왜 이렇게 많이 깨졌어?” 핀잔에 가뜩이나 힘겹던 소년의 뒤가 갑자기 가벼워졌다.

공명규를 찾아나서 이곳저곳을 헤매던 김사용이 말없이 리어카를 밀고 있었던 것이다.
김사용은 아주머니에게 대신 사과하며 청소까지 해줬다. 김사용은 돌아온 공명규를 앞에 세우고 관원(館員)들에게 말했다.

“며칠 동안 명규가 사라진 이유가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야. 너무 힘들게 운동하는데 너희가 내일부터는 쌀 한 줌씩만 더 가져와라.” 처음 느껴보는 따뜻한 정(情)에 공명규는 속으로 울었다.

사라진 어머니

그 대회에서 공명규는 4강까지 진출했다. 당시 한국일보에 그의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외로운 주먹이 부모를 찾는다!’. 그 기사를 보고 부모를 자처하는 인물들이 회기동 청산체육관에 구름처럼 몰렸다.

그는 아버지를 찾았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 홀로 생활했기에 도무지 가족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가족은 그에게 “복싱을 이제 그만두라”고 했다.

부모를 자처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어떻게 ‘진짜’를 찾았나요.
“제가 살던 곳이 공덕동이었어요. 한흥시장이며 지명이 비슷했어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고모였던 공옥진(孔玉振) 선생이 제게 잘해줬어요.”

왜 복싱하는 걸 만류했을까요.
“경기장에서 전신에 피가 낭자한 아들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어요. 어쩔 수 없이 글러브를 벗었지만 젊은 혈기를 억누를 수 없었어요.”

그래서 뭘 했습니까.
“태권도를 배웠지요. 당시 체육관에서는 태권도도 쿵푸도 같이 가르쳤어요. 제가 태권도와 쿵푸가 각각 7단입니다.”

태권도는 당시 국기원으로 통합되기 전에 여러 파(派)가 있었지요.
“저는 지도관에서 배웠습니다.”

뭐가 되려 했습니까.
“태권도 사범이 돼 해외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는데도 ‘백’이 필요하더군요. 제가 아무것도 없는 입장이었잖아요. 그래서 요즘 말로 ‘뜨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했습니다.”

‘별의별 짓’이 뭡니까.
“예전에 MBC에서 인기를 끌었던 묘기 대행진이라고 기억나시죠? 지금 국회의원이 된 변웅전(邊雄田)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거기 출연하려 했어요.”
출연했나요.
“아무것도 없는 저를 받아줄 리가 있나요. 궁리 끝에 스케이팅을 배웠어요. 예전의 동대문 스케이트장에 몰래 들어가서요.”

태권도가 스케이팅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그때는 겨울이 되면 한강이 꽁꽁 얼었잖아요. 스케이트를 타고 태권도 시범을 보이려 했죠. 마침내 기회가 왔어요. 한강에서 스케이트 타고 공중으로 날아 격파하는 시범이 화면을 탔습니다.”

다른 일도 했나요.
“문선명(文鮮明) 총재라고 계시죠? 그분이 이끄는 통일교에서 ‘오! 인천’이라는 영화를 제작했어요. 6·25가 무대인 작품인데 그 영화에서 한강을 폭파한 뒤 강물 속으로 다이빙하는 게 바로 접니다.”

그렇게 해서 외국으로 나갔습니까?
“그게, 그런 것만으로는 안되더군요. 밀항(密航)했습니다.”

밀항
아르헨티나에 가는 게 그의 목표였다. 1978년 월드컵 축구에서 아르헨티나가 우승하면서 소개된 영상을 보고 그곳이 꿈의 이상향(理想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맨 주먹뿐인 그를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각 끝에 그는 볼리비아인의 여권을 구한 뒤 자기 사진을 붙이고 김포공항을 떠났다. 한국~대만~일본~미국~브라질~파라과이를 기적처럼 무사통과 했다. 당시 볼리비아 여권에는 신장이 기재돼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긴 코스를 무사히 빠져나갔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당시 볼리비아 여권에는 신장을 적는 난이 있었어요. 제가 외국어를 못했어요. 원래 여권 주인의 키가 162㎝였는데 저는 178㎝였어요.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어떻게 했습니까.
“검색대를 통과할 때마다 다리를 저는 흉내를 냈지요.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그땐 그게 통했어요.”

파라과이에서 아르헨티나로 갔지요.
“그렇게 찾아간 파라과이에서 동료 태권도 사범들의 도움을 받으며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지냈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아르헨티나로 갔어요. 제가 찾아간 김한창 사범이 한사코 저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혹시 자기 영역을 빼앗길까 봐 그런 겁니까.
“이유가 있었어요. 당시 해외사범들은 ‘맞짱’으로 실력을 과시해야 했습니다. 경쟁 도장끼리, 아니면 동네 건달이 도전해올 때 실력 발휘를 해야 했어요. 얼마나 ‘나이롱’ 사범이 많았는지 가라데, 쿵푸 유단자와 붙으면 판판이 깨진다는 겁니다.”

실력을 과시했겠네요.
“할 수 없잖아요. 씩 웃고 대련(對鍊)에 나섰지요. 복싱에 태권도, 쿵푸까지 배웠는데 누가 무섭겠어요.”

경력을 보니 형무소에 수감된 적도 있네요.
“아르헨티나에서 자리를 잡은 뒤 볼리비아로 된 국적을 한국으로 되돌리려 했어요. 그런데 일껏 찾아간 대사관에서 그를 이민국에 신고해버린 겁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한참 떨어진 고도(孤島)의 형무소에 수감됐어요.”

황당했겠네요.
“너무 억울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한국인인데. 제가 그래서 한이 많습니다. 오죽했으면 아르헨티나 이민국 공무원이 이런 말까지 했어요. ‘너희 나라 영사가 오기만 하면 풀어줄 텐데 왜 아무도 안 오느냐’고.”

어떤 형무소였습니까.
“ ‘빠삐용’이란 영화 본 적 있으시죠? 무인도에 있는 교도소였는데 주로 마피아들이 수감된 곳이었어요. 그곳에서도 말썽이 생겼죠.”

무슨 사건입니까.
“어느 날 마피아 두목이 제 뒤로 슬금슬금 접근한 거예요. 성폭행하려던 것이었어요. 처음에는 피하기만 했는데 나중에 화가 치밀더군요.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어요. 밤새도록. 나중에 보니 20명이 넘게 바닥에 누워 있더군요.”

그래서요.
“독방(獨房)에 수감됐죠. 그렇게 두 달을 보내고 있을 때 김한창 사범이 탄원서를 내 풀려났어요. 그때 통역을 맡았던 처녀가 바로 지금의 제 첩니다. 제가 불쌍했는지 김밥도 싸다 주고 그랬어요.”

포클랜드전
그는 ‘아내가 왜 무국적에 직업도 변변치 않은 청년과 사랑하게 됐느냐’고 묻자 “헤헤”하고 웃었다. 그러면서 “처가의 반대가 심해 둘만 외롭게 결혼식을 올렸다”고 했다. 지금은 처가에서 인정받는다고 했다.
출소 후 할 일 없던 그에게 또 한 번의 반전(反轉)이 찾아온다. 바로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포클랜드 전쟁이 터진 것이다. 그 소식에 그는 ‘드디어 기회가 왔다!’며 환호작약했다고 한다.

전쟁이 터진 게 뭐가 그리 기쁩니까.
“당시 아르헨티나 청년들은 전쟁이 뭔지 몰랐어요. 전쟁터에 서로 나가지 않으려 다 내뺄 때였어요.”

갑자기 한국 청년이 전쟁에 참전하겠다니 그들도 놀랐겠군요.
“아내를 통역 삼아 육군병무청으로 갔어요. 좋아했지만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나는 한국에서 아르헨티나를 그리고 온 사람이다. 너희 나라가 어렵다는 데 내가 돕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지 않느냐. 내 특기가 육박전이다’라고요. 곧바로 제가 무술 시범을 보였어요. 10여명을 제압해버렸습니다.”

그랬더니요.
“그 일이 당시 대통령에게까지 보고가 됐어요. 당시 아르헨티나는 군정(軍政)이었어요. 군부 입장에선 제가 좋은 홍보거리였을 겁니다. 아르헨티나 신문에 제 기사가 대서특필됐어요.”

신문에 자주 등장하네요.
“당시 신문에는 ‘봐라! 한국의 청년도 이렇게 포클랜드전 참전을 자원하지 않느냐’는 내용으로 보도됐어요.”

막상 큰소리를 쳤지만 후회될 법도 한데.
“포클랜드섬에서 600㎞ 떨어진 곳에 꼬모도 리바다리아라는 항구가 있어요. 주위에서 아는 사람들이 ‘도망가라’고 했지만 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어요. 나라 망신이기도 하잖아요. 제가 좀 단순해요.”

그래서 영국군과 싸웠습니까.
“꼬모도 리바다리아에서 포클랜드행(行)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는데 엄청난 일이 터졌어요. 아르헨티나 함정이 영국 미사일 한방 맞고 격침돼버린 겁니다. 놀란 아르헨티나가 항복해버렸어요. 순식간에 전쟁이 끝나버린 거죠.”

또 헛물만 켠 겁니까.
“그렇진 않았어요. ‘자원해줘서 감사하다’는 대통령 표창을 받고 영주권을 얻었지요.”

그것뿐이었습니까.
“그때까지 저를 외면하던 대사관에서 국적을 슬그머니 회복시켜주더군요. 미국에도 가게 됐어요.”

미국엔 왜 갔습니까.
“당시 이소룡(李小龍) 영화 붐이 뒤늦게 일었어요. 6개월간 교육을 받았는데 영화에는 한 편도 출연하지 못했습니다. 영어를 잘하지 못했으니까요. 아르헨티나로 되돌아왔습니다.”

아르헨티나 군인들과의 인연이 꽤 깊다면서요.
“전쟁 때 맺은 인연으로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을 가르치다 나중에 아르헨티나 육사(陸士)교관까지 지냈어요. 드디어 아르헨티나 상류사회로 진입하게 된 거죠. 그러고 나니 자신감이 생겨 미국 할리우드에도 갔어요.”

 
▲ KBS '인간극장-공명규의 탱고 아리랑' 프로골퍼, 그리고 탱고


한국에서 골퍼들은 라운딩이 끝난 후 소주나 폭탄주를 마신다. 아르헨티나에선 와인을 마시고 탱고를 춘다. 고아 아닌 고아에서 마침내 상류층 사회의 문을 열게 된 공명규는 골프와 탱고에 빠져들게 된다.

당시 아르헨티나 골프사회에는 4개 등급이 있었다. 핸디를 기준으로 이븐에서 9오버파까지가 A클래스다. B(10~16) C(17~24) D(25~36)로 갈수록 낮은 등급이다. 운동에 관해 천부적인 소질을 지닌 공명규는 골프에 매달렸다.

운동을 잘하면 골프도 잘 칩니까.
“제가 새벽잠이 없습니다. 체육관에서 전신(全身) 거울을 보며 매일 자세 연습을 했어요. 아르헨티나에는 퍼블릭코스가 없어요. 전부 18홀입니다. 거의 매일 골프를 쳤어요. 제가 한번 빠져들면 혹독하게 단련하거든요. 제가 장타력을 키우는 비법도 스스로 깨우쳤어요.”

어떤 비법입니까.
“격파할 때처럼 손목에 스냅을 주는 건데요, 그러면 300야드가 나가요.”

아르헨티나 국가대표까지 될 뻔했다고 들었습니다.
“중남미 대항전이 열릴 때였는데 국적 때문에 탈락했어요. 홧김에 아예 프로로 전향했지요.”

프로골퍼도 했습니까?
“그럼요, 제가 1993년에 전향해 1996년에는 아르헨티나 PGA 상금 랭킹 6위까지 했는데요.”

그럼 골프나 할 일이지 왜 춤바람이 났나요?
“한국에선 무도(舞蹈)를 춤이라고 여기는데 아르헨티나 탱고에는 깊은 사연이 있어요. 남아메리카가 신대륙이잖아요. 유럽에서 이민자들이 다 몰려왔어요.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인들까지. 그들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시(詩)를 쓰면 작곡가들이 곡(曲)을 만듭니다. 이방인(異邦人)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바로 탱곱니다. 일본인들 때문에 탱고에 매달린 것도 있어요.”

일본인들이 어떻게 했기에요.
“아르헨티나가 세계의 3대 곡창(穀倉)입니다. 일본은 이미 아르헨티나에 100년도 훨씬 전부터 진출해 각종 문화를 다 수입했어요. 탱고 선수권대회에서 우승도 많이 했어요. 일본에 질 수 없다는 생각도 작용했습니다.”

탱고는 어떤 댄스입니까.
“기본으로 8개 스텝이 있는데요, 무척 빠릅니다. 언뜻 보기는 요염하기도 하지요.”

아내가 화내지 않던가요.
“처음에는 몰래 했죠. 10년 넘게 몰랐으니까요. 의심도 많이 받았어요. ‘왜 이렇게 향수 냄새가 매일 바뀌느냐’고. 그럴 때마다 ‘여러 사람 만나니까 그렇게 됐다’고 둘러댔는데 무대에서 공연한 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아내의 귀에 들어가 들통이 났습니다.”

아르헨티나 여성들이 한국남성과 파트너가 되려 합니까.
“설움도 많이 당했지요. 한번은 발표회 전날 여자 파트너가 갑자기 없어지는 바람에 공원에 가서 나무를 붙잡고 돈 적도 있어요.”

춤바람이 역시 무섭군요.
“춤바람 춤바람 하지 마시라니까요. 그걸 보고 아내도 저를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나중에는 든든한 후원자가 됐습니다.”

 
▲ 서초동 와인바의 지하창고 겸 간이공연장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는 공명규씨. 그의 뒤에서 수제자 우성필씨가 탱고를 추고 있다.


새로운 도전

1997년 공명규는 아내와 아들 딸을 아르헨티나에 놔두고 귀국했다. 자신을 업신여긴 한국에서 탱고로 성공해보겠다는 야심이었다. 그는 쓴맛을 봤다. IMF외환위기로 사람들이 춤을 거들떠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공명규는 시작하면 끝을 본다. 2003년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탱고 홍보대사’로 임명되고 1년 뒤 한(韓)·아르헨티나 수교 45주년을 기념해 세계 3개 극장인 세르반테스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마친 뒤 재도전에 나선 것이다.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만족을 못하고 망할 수도 있는 길을 떠난 겁니까.
“사람은 돈이 아니잖아요. 돈을 기계가 찍어내면 되지만 사람은 기계가 찍어낼 수 없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삶인데요.”

여러 차례 국내 공연에서 성공한 적이 있나요.
“무료입장권을 배부할 때는 객석이 꽉 차다가 유료 때는 안 와요.”

한국에선 아직도 무도에 대해 오해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보는데요. 탱고가 광고에까지 등장하지 않습니까. 제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지요.”

손해도 많이 봤겠네요.
“비행기 표 값만 해도 몇억이 될 겁니다. 제가 1년에 한 번은 꼭 아르헨티나를 다녀오거든요.”

아직도 한국에서는 ‘무도=카바레’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카바레는 가봤습니까.
“제가 거기 발걸음을 했다가 동영상이라도 찍히면 뭐가 되겠어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공연입니까.
“9일부터 18일까지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에서 공연합니다. 무용수만 14명, 연주자가 6명, 조명음향기사까지 합하면 25명입니다. 꼭 성공해야 할 텐데.”

또 실패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목숨을 걸겠습니다. 그런데 참 공교롭게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요. 얼마 전 공연도 신종플루 때문에 실패했거든요.”

이런 질문을 해야 하니... 혹시 아르헨티나에서 아내에게 쫓겨난 거 아닙니까? 이렇게 오래도록 혼자 지내니.
“저기 있는 저분이 제 처남입니다. 아이들도 응원 편지를 보내주고요. 참, 의심도 많으시네.”

신사동 주택가 지하 스튜디오에 다시 탱고 음악이 울려 퍼졌다. 공명규와 사브리나가 몇 차례 탱고를 추더니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밖에 나오니 빛이 훤했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異邦人)의 서두(序頭)가 생각났다.


문갑식 기자 gsmoon@chosun.com

입력 : 2009.10.10 03:29 / 수정 : 2009.10.11 17:46

(원문보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10/20091010000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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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꿈을 쫓아 가는 삶... 그것이 인생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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