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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by 202020 2009.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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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특집] 기타노 다케시/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혹은 거대한 순수 | 게시판 글 모음   2004/03/14 12:55  
 
http://blog.naver.com/wapi330/40001284681
출처블로그 : 弱之勝强 柔之勝剛 
출처 http://search.hani.co.kr/data/cine21/1998/1215/1180145641.html


[특집] 기타노 다케시/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혹은 거대한 순수

누군가는 (하나-비)의 감독 기타노 다케시와의 인터뷰를 "맨손으로 물고기잡기"라고 표현했다.
그 말처럼 프로페셔널한 연예인의 능수능란한 미사여구와 쑥스러운 듯한 미소와 함께 넌지시 던져지는 진실들 사이에서,
기타노 다케시란 인물은 (하나-비)의 주인공 니시 형사처럼 검은 선글라스 뒤에 숨어 있다.
11월28일 오후 6시, 도쿄 아카사카지역의 오쿠라호텔에서 만난 기타노 다케시 역시, 거대하면서 순수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물을 때는 의표를 찌르는 농담 한마디로 좌중을 사로잡았다가, 영화얘기로 돌아가면 심오한 삶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일본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다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눙치는 등, 지극히 성실하고, 지극히 사려깊고,
지극히 즐거운 인터뷰를 이끌어갔다. 오른손으로는 연신 오토바이 사고로 마비된 오른쪽 안면을 만지면서도,
자신이 지어야할 표정을 결코 잃지 않았다. 작고 다부진 몸매의 이 사내가 일본 연예계를 뒤흔드는 "엔터테인먼트의 신"이란
것은 잘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1시간30분 남짓의 인터뷰만으로도 천재라는 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저속한 코미디언, 세계 정상의 감독
이 기타노 다케시란 이름은 이제, 일본영화 개방 1호의 주인공으로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기타노 다케시는 오즈 야스지로와 구로사와 아키라 이후 일본영화에서 결여된 "무엇"을 지난 10여년간 훌륭하게 메워준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극단적인 폭력과 한없이 고요한 명상이 동전의 양면처럼 겹쳐 있으며, 가장 일본적인 정서와
미학을 보여준다. 영화평론가 이와모토 겐지의 말에 따르면, "억제된 작품, 역설적으로는 과잉할 정도로 억제된 작품"이다.
"그 고요함 속에 돌발적인 폭력이 숨어"있으며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의 분위기"가 배어나는 것이다.
오즈 야스지로 영화는 고통과 좌절로 가득 찬 세상을 절통한 느낌으로 받아들였다. 반면 오시마 나기사와 이마무라
쇼헤이는 폭력과 공포로 가득 찬 세계를 분노하며 맞서왔다. (필름 코멘트)는 "(하나비)가 이 두가지 전통의 균형을
이루었다"고 절찬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하나비)는, 개방 1순위인 가장 예술적인 영화인 동시에 가장 개방을
꺼리는 "일본색이 강한" 영화인 것이다.

그러나 더 아이로니컬한 일이 있다. 기타노 다케시는 일본에서 비트 다케시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하다.
기타노 다케시를 만나러 가기 직전, 아사쿠사 뒷골목의 허름한 식당에서 라면을 먹으면서 비트 다케시에 대한
사전정보를 들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대학가기 전까지 일본에서 살았다는 통역의 말에 의하면 비트 다케시는
"일본 엔터테인먼트계의 신"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비트 다케시가 출연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지 않은 아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다케짱"이란 가면을 뒤집어쓰고 나와 엎치락 뒤치락 하는 이야기가 일본 대중을 완벽하게
사로잡았다고 한다. 즉 코미디언이자 쇼프로그램 진행자이기도 한 비트 다케시는 "상업적이고 천박한" 일본 대중문화의
아이콘, 그 자체다. 비트 다케시가 83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슈퍼 조키)라는 오락프로에서는 상품을 타기 위해
비키니 차림의 여성이 뜨거운 물에 뛰어들고, 역겨운 맛의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하고, 벌칙으로는 전기 충격을 가하는 등
우리 기준으로는 "엽기적"인 일들이 수시로 벌어진다. 그런 "저속한" 코미디언이 일본 최고의, 세계 정상급의 영화감독이라고?
한번은 다케시가 애인과 함께 러브호텔에서 나오는 사진이 (프라이데이)란 주간지에 실린 적이 있었다.
그때 다케시는 자신의 영화에서와 똑같은 일을 했다. 후배들을 데리고 (프라이데이) 편집실을 때려부순 것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겉과 속이 별다른 여과장치 없이, 한순간에 터져나오는 "순수한" 예술가다.

"괴물" 혹은 "신"을 만든 환경
그것만이 아니다. 이를테면 기타노 다케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장 콕토같은, 장르를 가리지 않는 천재다.
일본에서 기타노 다케시의 얼굴을 보고 싶으면 언제든 TV를 틀면 된다. 기타노 다케시는 (다케시의 누구든지 피카소)
(기타노후지) (아타치쿠의 다케시, 세계의 기타노) (기타노의 만물창세기) 등 1주일에 무려 9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그것뿐이 아니다. 6개의 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면서 시집, 소설집, 에세이 등 55권의 책을 냈다.
현대 일본사회에 대해 독설을 풀어놓은 (왜 그들은 모두 나를 미워하는가)는 무려 100만권 넘게 팔렸다.
그러면서 전세계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는 영화도 만들고, 스포츠 해설가 노릇도 하고, 연예계의 "기타노 군단"이 만든
야구팀에서 가끔 시합도 한다. 요즘에는 그림도 그린다. (하나비)에 나오는 그림들은 모두 그의 작품이다.
이 많은 일을 다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 보인다. 기타노 왈 "10일 동안 TV프로를 찍고, 다음 10일 동안은
영화를 찍는다. 다시 10일 동안은 TV프로를 찍고, 10일 동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래도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성장환경이 이 "괴물" 혹은 "신"을 만들었을까? 기타노 다케시는 1947년, 일본의 브루클린 버전이라고 할
도쿄 센주지역에서 태어났다. 가정환경은 열악했고, 무능력한 아버지와 열성적인 어머니 밑에서 말썽꾸러기 골목대장으로
성장했다. 잘하면 야구선수가 될 수도 있었고, 잘하면 권투선수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전히 "어머니" 때문에 운동을
포기한 다케시는 65년 메이지대 공학부에 입학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대가 심상치 않았다.
일본의 대학은 좌파학생들의 연합조직인 "전공투"의 물결에 휩싸여 있었다. 2학년 때 대학에서 쫓겨난 다케시는 다방 보이,
백화점 직원, 클럽 보이, 택시운전사 등으로 빈둥거리다가, 1972년 아사쿠사의 스트립극장 프랑스좌에서 엘리베이터맨으로
취직하면서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프랑스좌의 단장이었던 코미디언 후카미는 다케시의 재능을 인정하여,
어느 날 결원이 생긴 무대에 올려보냈다. 기타노 다케시는 74년 프랑스좌에서 만난 기요시와 "투 비트"라는 만담 콤비를
결성해 비트 다케시란 예명까지 얻었다. "투 비트"는 명문대 출신 코미디언이 기성사회의 관습과 상식에 대해
신랄한 독설을 퍼붓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큰 인기를 모았다.

그 남자, 모욕을 느끼다
코미디언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비트 다케시가 야망 또는 복수의 칼날을 품게 된 것은 83년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에 출연하면서이다. 2차대전 당시 영국군 포로수용소를 무대로 한 이 영화에서 다케시는
잔인한 겐조 상사 역을 맡았다. 코미디 연기가 아닌 대단히 심각한 연기를 보여준 것이다.
영화가 개봉되자 다케시는 극장에 들어가서 관객의 반응을 살폈다. 내심 기대는 자신의 심각한 연기가 관객에게
어필하기를 바란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 다케시가 등장하자마자 관객은 물론 극장 종업원들까지도 포복절도했다.
다케시는 이 광경을 목격하면서 "모욕"을 느꼈고 그것이 자신을 15년간 심각한 "배우" 역할을 연기하는 힘이었다고 말했다.
(그 남자, 흉포하다)에서 무표정하고 폭력적인 연기를 보여주었을 때도 이미 TV에서는 비슷한 연기를
몇편이나 하고 있을 때였다.

89년 (그 남자 흉포하다)는 원래 일본 야쿠자영화의 거장인 후카사쿠 긴지가 감독하기로 했으나, 일정 문제로 다케시가
감독까지 맡게 되었다. (그 남자 흉포하다)는 다케시 자신이 각본을 쓰지 않은 유일한 감독작이다.
하지만 이 코미디언 감독의 데뷔작은, 허무주의와 "억제"의 틈을 비집고 작열하는 폭력의 순간을 명징하게 잡아내는
"기타노 다케시" 영화의 훌륭한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코미디언이 아닌 영화감독으로서의 다케시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에 가서야 주목받게 되었다. (소나티네)는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대되어
전 세계 영화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94년, 기타노 다케시는 죽음을 넘나들었던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다.
한쪽 얼굴이 마비된 기타노 다케시는 그러나, 자신의 어린시절을 반추하는 (키즈 리턴)에 이어 97년 (하나-비)로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다. 일본연예계에서의 자리도 여전하다.

일본 TV는 최악, 젊은 세대는 싫다!
기타노 다케시는 이중적이다. 아니 다중적이다. 고독한 폭력형사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저속함과 천박함을 무기로
사회의 온갖 터부를 까발리는 DJ 하워드 스턴을 합쳐놓은 듯한 기타노 다케시는, 좌충우돌하면서도 결코 중심을 잃지 않는다.
기타노 다케시는 "프로덕션의 명령대로 움직인다"고 오리발을 내밀지만, "오피스 기타노"의 중심인물은 어디로 보나 다케시다.
일본연예계에서 다케시의 영향력은 막강하고 "다케시 군단"을 보스처럼 이끌어간다고 한다.
게다가 엔터테인먼트건, 영화예술이건, 기타노 다케시의 아이디어와 예술적인 재능은 여지없이 빛나고 있다.
어떻게 그 많은 프로그램을 하냐고 물어 보면 "일본 TV는 최악"이라며 "아무 생각없이 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일본경제를 이끌어가는 젊은 세대를 아주 싫어한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전후 민주주의 교육을 비난하는 다케시의 주장은 확고하다. "개인이 책임"지라는 것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떠안고,
자신이 해결하라는 질타는 결코 가미가제 같은 자폭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비) 이전의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은
도망치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나 (하나비)는 죽음과 얼굴을 맞대고, 대결하고 있다.
한마디로 기타노 다케시는 "현대 일본"이 못마땅한 것이다. 도쿄대 총장이자 영화평론가인 하스미 시게히코의 분석에 따르면
다케시는 "우리 시대의 희생양을 연기"한다. 그는 TV에서 가장 천박하고 폭력적으로 사람들을 웃기고,
영화에서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간다. 결국 다케시가 영화를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내가 즐겁기 위한"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천재만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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