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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인물 : 파스퇴르유업 매각한 최명재 前 회장··· “세번째 전쟁서도 우리는 이겼다”

by 202020 2009.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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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와 민사고 남겼으니 승리한 것”
글 횡성=이상재 기자 (sangjai@joongang.co.kr)

올리버 스미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미국 해병1사단 사령관으로 흥남 철수를 성공적으로 이끈 장군이다.
차라리 죽음을 택했지 후퇴를 불명예로 여기는 해병 부대원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스미스에게 흥남 철수는 후퇴 작전이 아니었다. 그는 “해병에게 후퇴는 없다.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고 있는 중”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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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재(78). 87년 파스퇴르유업을 창업해 ‘진짜 우유’ 논쟁을 일으킨 ‘우유업계의 이단아’다.
96년엔 ‘그런 학교는 지구에 없다’는 비난을 뒤로 하고 민족사관고등학교(민사고)를 세운 고집쟁이 교육자이기도
하다. 한때 업계 5위에 오르기까지 했던 파스퇴르는 외환위기를 만나면서 좌초했고,
지난 6월21일 한국야쿠르트에 인수됐다. 최명재라는 이름 앞에 ‘실패한 경영인’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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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퇴르의 이청 전 이사는 이 ‘실패한 경영인’을 올리버 스미스와 오버랩시켰다.
“무엇보다 최회장은 저온살균 우유와 파스퇴르라는 이름을 지키고 싶어했다. …
이것은(회사를 한국야쿠르트에 넘긴 일) 후퇴가 아니다. 최명재식(式)의 새로운 투자이고 최명재식 전쟁이다.
회장은 지금 세번째 전쟁을 치르고 있다.”

“후퇴라니, 방향 바꿔서 전쟁하는 것”
전북 김제 태생의 최명재 회장은 서울대 상대를 중퇴한 뒤 상업은행에 몸담았다. 택시 운전대를 잡기도 했고,
나중에는 충무로에 다방도 열었다. 그러다가 중동으로 건너가 운수사업으로 큰돈을 벌었고,
이 돈을 밑천 삼아 파스퇴르유업을 세웠다. 그의 나이 예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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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소사리. 해발 1,000m가 넘는 덕고산에 털썩 주저앉은 듯이 자리잡은
파스퇴르 공장과 민사고 터는 70만평이 넘는다. 여의도와 맞먹는 넓이다.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팜 스프링스 목장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는 모습에 반해 “저거다” 하며 목장 사업을 결심하면서 사들인 땅이다.
파스퇴르 공장 왼쪽으로 민사고가 자리잡고 있다. 지난 6월22일 오후 기자 일행은 횡성에 도착했다.

“마지막 조회는 초라했습니다. 대강당에서 사장님(정금화씨로 최회장의 부인이다)의 이임사가 있었는데….
‘더 좋은 경영인이 와서 파스퇴르를 더 좋은 회사로 키워줄 것’이라는 짧은 내용이었습니다.
사장님은 눈물을 보였지만 옆에 앉아 있던 회장님은 표정이 없었습니다.”(이청 전 이사)

기자가 도착했을 때 최회장은 자리에 없었다. 이임식을 마친 회장 부부는 11시 30분쯤
“서울에 다녀오겠다”며 회사를 비웠다. 이날 야쿠르트의 새로운 경영진이 방문했는데 일부러 몸을 피해준 것이다.

그러나 최회장은 저녁 6시도 안 돼 민사고 기숙사 10층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서울 집에서 여유 있게 차(茶) 한잔 마시지도 못하고 급하게 돌아온 것인데, 그만큼 횡성에 대한 마음이
간절했던 것 아니었을까. 최회장은 두 사람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한 사람은 아내인 정금화 사장.
다른 한 사람은 간병인이었다. 최회장은 2000년 7월 제주도의 한 호텔 사우나에서 화상 사고를 겪고 난 뒤부터는
몸을 가누는 것이 많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이때부터 바깥 사람 만나는 것을 꺼리고 있다.

파스퇴르가 무너진 데는 민사고 설립이 치명적이었다. 95년 인가받은 민사고는 이듬해 개교했다.
건물을 올리는 데만 500억원이 들었고, 연간 40억∼50억원이 운영비로 나갔다.
지금까지 학교 지원에 들어간 돈이 800억원가량. 비슷한 시기 회사는 식품 부문 투자를 늘렸다.
회사 인근 우천면에 파스퇴르식품을 설립했고 성남에 주스공장을 지었는데, 모두 200억원이 들었다.

그런데 외환위기가 터졌다. 당시 중학생이던 막내딸의 돼지저금통까지 탈탈 털어 넣었지만
회사는 이미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파스퇴르가 부도난 것은 98년 1월31일.
최회장은 ‘부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신문 광고까지 내면서 ‘거창하게’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성남시 미금역 인근에 20평짜리 아파트를 얻어놓고 자장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그를 다시 불러낸 것은 채권단이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하라는 것이었다.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기인데 어떻게 손을 놓을 수 있냐”며 민사고를
지원한다는 조건을 달아 현업에 복귀했다. 그의 나이 일흔이었다.

노(老) 회장은 이내 회사를 회생시키지 못했다. 화의 상태에 있는 회사가 은행 빚을 더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일한 희망은 매출이 올라주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그래프는 고꾸라지고 있었다.

구조조정 기회는 없었을까? 다시 이청 전 이사의 말이다. “지난 6년 동안 500명 직원 가운데 한명도
자르지 않았습니다. 밥을 조금 적게 먹을 수는 있어도 밥그릇은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 회장님의 신념이었습니다.
최근 명예퇴직 신청을 받아 63명이 나갔지만 그것은 정말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지난해부터 투자자를 유치하려고 나섰으나 간단치 않았다. 한편으론 매각 협상도 진행됐다.
 “언제든지 물러나겠다. 능력 있는 경영인을 수혈받고 민사고 지원을 약속하면 된다.”
최회장이 내놓은 매각 조건은 이렇게 간단(?)했다.

그러나 ‘민사고 지원’이라는 꼬리표 앞에서 매수자들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이청 전 이사의 말대로 “‘최명재 스타일’은 없었다”. 결국 지난 4월부터 회사와 학교는 딴 살림을 시작했다.

이러면서 야쿠르트가 새 주인이 됐다. 세간에 알려진 매각 가격 500억원이라는 말은 와전이다.
이 전 이사는 “회사가 갚아야 할 은행 빚이 650억원인데 이 돈을 야쿠르트 측이 떠안는 조건이었다”며
“빚을 탕감 받으면 500억원쯤 되지 않겠느냐고 추측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야쿠르트 측의 테크닉이다”고 말했다. 최회장은 나이 여든을 앞두고 빈털터리가 된 것이다.

“敵들이 나를 키웠다”
최명재 회장은 사업가나 교육자라기보다는 전쟁을 치르는 장수였다.
그래서 최회장은 “적(敵)들이 나를 키웠다”는 우스갯소리를 자주한다. 이른바 ‘저온살균 우유’ ‘고름 우유’ 등으로
우유 전쟁을 벌일 때는 경쟁업체는 물론 언론·소비자단체·정부기관에 정면 대응으로 맞섰다.

일간지 1면에 게재됐던 직설적 카피는 ‘최명재식 광고’로 유명했다. 우유 전쟁을 벌이면서 파스퇴르는
87년 설립 당시 한해 매출 5억원에 불과한 소기업에서 이듬해부터 월 5억원,
그 이듬해는 월 100억원을 올리는 우유업계 빅5 회사로 성장했다.

민사고를 만들면서부터는 교육당국·학부모·선생들과 전쟁을 벌였다. 선생들은 이상(理想)만 가지고는 못 버틴다고
비아냥댔고, 부모들은 민족이니 조국이니 하는 말보다 서울대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최회장은 이들을 보기 좋게 물리치고 민사고를 가장 모범적인 영재학교로 키워냈다.

‘파스퇴르 살리기’에 나섰던 세번째 전쟁은 패배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전 이사의 말은 정반대다.
“일단 승리”라는 것이다. 브랜드를 지켰고, 민사고 역시 자립의 길을 모색 중이라고.

기자 일행이 ‘초상집에 가서 고집쟁이 회장을 만나 코멘트를 받아오라’는 과제를 끝내 풀지 못하고 횡성에서
나온 것은 23일이다. 태풍 ‘디앤무’ 탓에 이틀 내내 하늘은 을씨년스러웠다. 산(山)도 을씨년스러웠다.
그런데 서울로 돌아오는 뒤통수에 대고 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후퇴라니! 나는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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