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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언. Maxim

위험하게 살아라 - 인생은 도박이다 (오쇼 라즈니쉬)

by 202020 2009.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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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게 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위험하게 산다는 것은 진실로 살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위험하게 살지 않는다면 그대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꽃은 오직 위험 속에서만 피어난다. 안전 속에서는 삶의 꽃이 피어나지 않는다.
삶의 꽃은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만 피어난다.

안전을 도모할 때 그대는 고여 있는 연못이 된다. 에너지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그대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법을 모르므로 두려움에 떨게 된다.

왜 위험을 감수하는가? 이미 알려진 것이 더 안전하다. 이때 그대는 친숙한 것에 집착하게 된다.
그대는 친숙한 그것에 질리고 싫증이 났다. 그것으로 인해 불행하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익숙하고 편안해 보인다.
적어도 그것은 그대에게 잘 알려진 것이다. 이것이 안도감을 준다. 반면에 미지의 것은 그대를 떨게 만든다.
'미지'라는 개념 자체가 그대에게 불안감을 준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들은 죽음을 선호한다.
그들은 안락한 무덤을 원한다. 이들과는 달리 참된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위험한 삶을 선택한다.
삶은 위험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등산을 해본 적이 있는가? 높은 산에 오를수록 더 새롭고 젊어지는 느낌이 든다.
추락의 위험이 클수록, 바로 옆에 시커먼 골짜기가 입을 벌리고 있을 때 그대는 더 왕성하게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을 때에는 권태가 끼여들 여지가 없다. 과거의 잔재도 없고 미래에 대한 욕망도 없다.
현재만이 불꽃처럼 활활 타오른다. 그것으로 족하다.

파도타기를 하거나 스키를 타고 활강할 때에 그대는 '지금 여기'에 산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순간에 삶의 환희가 용솟음친다.
그 위험이 그대의 생명력을 타오르게 한다. 사람들이 위험한 스포츠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그것이다.

누군가 힐러리에게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고 했습니까?라고 묻자 힐러리는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힐러리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거의 6, 70년 동안 여러 등반대가 에베레스트에 도전했지만 거의 다 죽음을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에베레스트에 오르고자 했다. 과연 무엇이 사람들을 그렇게 유혹했던 것일까?

판에 박힌 안정된 생활에서 벗어나 높은 곳에 올랐을 때 그대는 야성(野性)을 회복한다. 다시 그대는 동물 세계의 일부가 된다. 그대는 사자나 호랑이, 또는 굽이치는 강물이 된 것 같은 야성의 생명력을 느낀다.
높은 하늘을 비상하는 독수리처럼 고동치는 삶의 맥박을 느낀다.
세상의 온갖 안전장치, 은행 잔고, 부인, 남편, 가족, 사회, 교회, 명망, 이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그대는 혼자가 된다.

이것이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스포츠는 진짜로 위험한 것이 아니다.
기술을 연마해서 능숙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리 예상할 수 있는 의도적인 위험이다.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계산된 위험'이다.

등산의 경우, 그대는 훈련을통해 만일의 사태에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
시속 백마일로 질주하는 스피드 드라이빙(speed-driving)은 위험하고 스릴이 있다.
그러나 그대는 훈련을 통해 능숙한 운전자가 될 수 있다. 제3자의 눈에는 위험해 보이겠지만 그대는 별로 위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설령 위험요소가 있다고 해도 어느 한계 내에서의 위험이다. 그리고 이런 위험은 신체에 국한된다.

내가 위험하게 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신체적인 위험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위험,
최종적으로는 영적인 위험까지 포함시켜서 말하는 것이다.
종교는 영적인 모험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것이 종교이다.

위험하게 살라는 내 말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일상적인 삶에 매달리지 말라는 뜻이다.
그대는 한 도시의 시장이거나 어떤 조직의 임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삶은 아니다.
그대는 돈을 잘 버는 좋은 직업을 갖고 있어서 날로 재산이 늘어가고, 만사가 순조롭게 풀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사가 순조로울 때에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라. 그대는 덧없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대를 존경할 것이다. 그대가 죽으면 긴 애도의 행렬이 그대 뒤를 따를 것이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신문에 그대의 사진과 함께 애도하는 기사가 실리겠지만 곧 그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그렇게 허망한 것들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것이다.

조심하라. 너무나 평범하고 세속적인 것 때문에 그대의 삶 전체를 놓칠 수도 있다.
영적인 사람은 이런 사소한 것들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영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런 이해를 얻었다는 뜻이다.
지금 나는 그런 일들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내 말은 그런 것들이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그대가 생각하는 것만큼의 의미는 없다는 뜻이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돈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 거주할 집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고행주의자가 아니다. 집을 버리고 히말라야로 들어가라고 부추기지 않는다. 집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대를 위해 집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오해하지 말라.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마치 집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들은 집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 그들은 마치 은행계좌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돈을 모으는 일에만 매달리다가 죽어간다.

실제로 그들은 인생을 산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 한순간도 삶의 흐름에 일치하지 못했다. 삶의 맥박에 따라 고동치지 못했다.그들은 안전을 도모하고, 익숙한 것에 매달리고, 존경받는 삶에 집착하면서 닫힌 삶을 살았다.
그들은 안전한 감옥에 갇힌 수감자와 다름없었다. 권태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삶이 지긋지긋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만트라(mantra)를 염송하기만 하면 다시 활기찬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그들이 살아온 패턴 전부를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사랑하라. 그러나 그대의 여자를 부인으로 전락시키지 말라. 위험하게 살아라. 남자를 그대의 남편으로 전락시키지 말라.
남편은 추한 현상이다. 그대의 남자를 남자로 놔두고, 그대의 여자를 여자로 놔두어라.
그대의 내일을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라.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모든 일에 대해 열려 있어라.
이것이 위험하게 살라는 내 말에 담긴 뜻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즉시 교회에 가서 결혼식을 하고 관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려고 한다. 내 말은 결혼식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형식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형식이므로 요구대로 들어주면 된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속에서는 절대로 여자를 소유하지 말라. 단 한 번이라도 이제 당신은 내 소유다.라고 말하지 말라.
어떻게 한 인간이 그대의 소유가 될 수 있는가? 그대가 여자를 소유하면 그녀 역시 그대를 소유하려고 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양편 모두 이제는 사랑을 잃은 것이다. 그저 서로를 압박하고 조이고 마비시키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라. 사랑하되 결혼을 통해서 그 사랑을 낮은 차원으로 끌어내리지 말라.

일하라. 일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일밖에 모르는 인생을 살지 말라. 삶의 중심에 유희(play)가 있어야 한다.
일은 유희를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사무실과 공장, 상점에서 일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유희를 즐길 시간을 가져라.
그대의 삶을 온통 일투성이로 만들지 말라. 삶의 목적은 유희이다.

유희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행위를 뜻한다. 그대는 명상하기 위해 내게 왔으면서도 명상을 일로 받아들인다.
그대는 신적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난센스이다. 명상은 그런 식으로 되는 게 아니다.

그대는 유희를 즐겨야 한다. 명상을 하나의 놀이로 받아들여야 한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즐겨야 한다.
이렇게 즐길 때 명상이 더 깊어진다. 해탈과 열반을 얻겠다는 투지에 불타서 명상을 의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명상이라는 유희의 차원을 어리석은 개념으로 채색한 것이다.

명상은 놀이이다. 그것은 '릴라(leela)'이다. 아무 목적도 없이 명상 그 자체를 즐겨야 한다.
이렇게 다른 목적 없이 그 자체를 즐기는 일이 많아질 때 그대는 활기찬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물론 그대의 삶은 항상 위험에 처하겠지만 삶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위험은 삶의 일부분이다. 위험은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부분이다.
삶은 매순간 위험에 직면한다. 들숨과 날숨이 오갈 때마다 위험이 존재한다.
숨을 내쉰 다음에 다시 숨을 들이쉴 수 있을지 없을지 누가 아는가? 거기엔 어떤 보장도 없다.

일부 사람들은 종교마저 일종의 안전장치로 생각한다. 그들이 말하는 신은 최고의 안전장치이다.
그들이 신에 대해 생각하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원이나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묵상하는 이유는
신의 기록부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이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내가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그는 알 것이다.
그의 앞에 섰을 때 나도 할 말이 있다. 그들에게는 기도마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위험하게 산다는 것은 매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는 것을 의미한다. 매순간이 고유의 가치를 갖고 있다.
순간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 때 그대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대는 저기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죽음을 받아들인다. 죽음을 피해 도망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대는 앞으로 나아가 죽음과 직면한다.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그대는 죽음과 만나는 그 순간을 즐긴다.

죽음과 대면하는 순간, 죽음이 생생한 현실로 다가오는 그런 순간을 즐기는 것이 내가 말하는 위험하게 산다는 뜻이다.
사랑은 그대를 죽음과 대면하게 한다. 명상은 그대를 죽음과 만나게 한다.
스승을 만나는 것은 그대 자신의 죽음을 대면하는 것과 같다. 공(空)의 차원으로 사라진 누군가와 대면하는 것은
거대한 심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 심연 속에서 그대는 실종되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용기 있는 사람들은 저돌적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온갖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의 인생철학은 위험을 대비한 보험 따위와 연관이 없다.
그들은 등산가나 비행사, 서퍼(surfer)와 같은 인생철학을 갖고 있다.
그들은 외부 세상의 바다뿐만 아니라 내면 가장 깊은 곳의 바다에서 파도타기를 한다.
그들은 알프스나 히말라야 같은 외부 세상의 산뿐만 아니라 내면의 봉우리들을 탐사한다.

이 한 가지를 명심하라. 위험하게 사는 기술을 잊지 말라. 절대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항상 위험에 대해 열려 있어라. 위험을 즐길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
그러면 결코 패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위험하게 사는 것, 이것이 진실로 살아가는 단 하나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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