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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름다움을 즐겨봐! - 한겨례21 [이섭의 색정만가]

by 202020 2009.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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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대상화' 인공적 기준에 따른 과잉의미로 자존감 상실… 비인격적 잣대로 얼굴을 학대하지 말라

아기를 바라보는 눈길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도 대체로 사랑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않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주게 마련이다. 그러고는 사람들은 말한다. 아기들은 아름답다고. 아기들의 천연덕스러운 웃음은 천상의 미소로 불리며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 가운데 하나로 치부한다. 아기들의 얼굴과 몸짓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에 논쟁 없는 합일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기들의 얼굴을 구성하는 이목구비와 몸(신체)을 구성하는 몸통과 팔다리 그리고 머리는 일반적인 미의 규범상 쾌를 유발하거나 아름다움으로 말하기 곤란한 비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아기들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 안에서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다. 아기들은 아기 자체의 존재의미로, 그리고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상징으로 인해 아름다움의 대상이 된다. 큰 눈과 작은 코, 오물거리는 입과 토실토실한 뺨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목구비가 아니라 완벽한 아기의 것이기에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기가 자라 어른이 되고 나면 사람이기에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 코, 입이 비뚤어졌다느니 뜯어고쳐야 볼 만하겠다면서 아주 생뚱한 잣대를 사용하려 한다.

우리가 아기를 아름답게 여기는 이유

사람은 자신이 구하는 것을 한번도 발견하지 못하는 비극적 탐사자다. 아름다움을 찾는다거나 아름다움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점에서 그렇다. 아름다움보다 중요한 ‘것’을 상정한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그것을 찾아내지 못하는 입장에서 보면 실패와 낙담을 전제로 하는 탐사자로서 비극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물의 비례와 조화, 균형 등을 통해 쾌감과 불쾌를 나누어 느끼고 아름답다고 말하게 마련이다. 물론 아름다움에 대한 잣대는 제각각이어서 모든 것을 하나의 기준만으로 제시하고 통일된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형태의 불쾌를 뛰어넘을 만한 상징성이 개입되면 우리는 흩어져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조차 쉽게 하나의 통일된 의견으로 다듬어낼 수 있다. 이 경우 형태에 대한 상징성은 사회적 권력과 친밀성이 강할수록 아름다움의 보편성으로 확대되게 마련이다. ‘호수처럼 맑은 눈’이라는 문학적 표현은 ‘영화배우 누구를 닮은 눈’에게 상상을 허락하는 지위를 내놓은 지 오래되었다. 은행 같은 맵씨의 눈매도 쌍꺼풀이 없으면 소용없다가도 유명한 감독이 간절히 바라는 캐릭터와 맞아떨어지면 객관적인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재탄생하고 만다. 그것으로 모든 갈등이 끝을 내곤 그만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제 이목구비가 모두 어떻게 의미붙여지는지 모른 채 누군가로부터 의미부여가 될 때까지 기다린다.

우리는 어느덧 주변 사물들을 이리저리 모아놓고 사물들의 인격화를 시도하는 데 몰두한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자연스러운 형태’와 견주어 이미 아름다움의 대리인 역할을 자임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 만드는 재주에 탄복하게 할 정도다. 기성품의 가치와 의미는 생산성의 많고 적음, 희귀성을 떠나 자연과 대립하는 역할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기쁨의 대상이 되고 자랑거리가 돼버린 것이다. 아름다움의 잣대는 인간이 만들어낸, 자연을 교정하고 수정해 스스로가 인격을 갖게 된 사물(사물화)에 있다.

사물이 사물 그대로 인정되기보다 덧씌워진 의미의 과잉 때문에 사물의 인격화가 진행되면 우리는 기꺼이 사물을 중심에 놓고 삶을 재편한다. 이처럼 삶의 방편으로 만들어지거나 의미부여가 되기 시작한 사물들이 알쏭달쏭한 의미로 무장될수록 사물은 삶과 친연성을 잃은 채 밖으로 튕겨져 나가버린다. 마치 모델하우스의 완벽한 인테리어와 소품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삶 밖의 사물들로 구성되는 ‘허위세계’는 삶을 현실과 격리시키는 데 일조한다. 이렇듯 사물로 채워진 커다란 공간 안에서 겨우 구석자리 하나 차지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결코 퇴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녕 사물에 종속되어 살고 싶은가

우리는 몸 가운데도 얼굴이 마치 자신의 거의 모든 전체인 양 생각하며, 얼굴의 어디 한구석이라도 유명 연예인을 닮은 이목구비를 갖고 싶어하고, 관상이라는 이름으로 돈이 붙고 명예가 있다는 얼굴 생김새의 상관관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지 않는가. 우리가 우리의 얼굴을 구성하는 이목구비에 하나둘씩 붙여버린 의미를 생각해보라. 그것은 모델하우스나 온갖 상품으로 도배된 홈쇼핑 광고처럼 우리 얼굴조차 사물에 덧씌워진 과잉의미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우리는 과잉된 의미를 찾아나서는 데 기꺼이 동참하면서 자연스러운 얼굴의 모습보다 상징으로 사물화돼버린 눈과 코 그리고 입과 귀의 형태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한 퇴행적 행동들을 우리가 더 이상 퇴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사물에 기꺼이 종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닌지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사물에 종속되기를 실제로 바라는 사람은 없다. 또한 자신의 몸과 자신으로 받아들여지는 얼굴이 사물처럼 다른 사람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자신의 외모 평가에 대해 인격을 완전히 배제한 채 용모만을 기준삼는다면 어떤 누구도 그런 평가대상에서 자신이 제외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몸, 그 가운데도 얼굴은 늘 사물처럼 객관화된 어떤 기준표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거나 판단대상이 돼왔다. 눈의 형태에 대한 편견과 오해 그리고 오랫동안 통용돼온 관습적 실례를 보자. 작고 가로로 길며 삼각형 형태를 한 눈을 매서운 눈매로 여기거나 범죄자형 눈으로 억지를 쓰는 것처럼, 크고 동그란 눈은 선하고 착한 사람의 눈으로 쉽게 여겨버린다.

“쌍꺼풀을 가진 눈이 아름답지 않다”

이런 의미의 차이는 사실과 사뭇 거리가 있음에도 ‘대체로’라는 전제 아래 비슷한 가치판단의 근거가 돼왔다.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과 표현하고픈 생각을 가능한 한 논리적으로 구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아름다움’처럼 추상적이고 이미 그 시작이 개인적 판단에 근거하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 강제에서 좀처럼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내 말 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 껴안는다. 이럴 경우 당연히 우리는 ‘대체로’ 뜻이 통용될 수 있는 판단과 전달방식을 선택하는데, 이 경우 혼란스러운 인상을 피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표현하게 마련이다.

당연히 우리는 사물에 부가된 의미(과잉되었더라도)처럼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설명방식을 선택한다. “네 눈이 쌍꺼풀이 없어도, 작아도 아름다워”라고 하려면 우리 사회에서 작은 눈은 ‘대체로’ 아름다운 조건으로 받아들여지거나 최소한 쌍꺼풀을 가진 눈이 아름답지 않다고 ‘대체로’ 말해져야 한다. 마치 3000cc 배기량의 자동차가 ‘대체로’ 가지는 과잉된 의미를 공유하듯 말이다.

이섭 ㅣ 전시기획자·아트컨설팅서울 큐레이터 soplee60@hanmail.net   2003년03월13일 제4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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