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에 태어나 40세를 못 넘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 시인의 어떤 점이 그를 아직까지도 한 나라의 문화 상징으로 만들어 주는 걸까.
푸슈킨이 지녔던 창조적 상상력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푸슈킨의 작품을 읽다 보면 이런 식의 의문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의심으로 바뀐다.
정말로 무엇 때문에 이 정도의 시인이 천재라 불리는 것일까.
처음 읽는 사람에게 푸슈킨의 작품은 시건 소설이건 드라마건 어느 것 하나 신선한 감동을 주지 않는다.
아름다운 시로 치면 푸슈킨보다 더 아름다운 시를 쓴 시인들이 많다.
양으로 따져도 다른 거물급 작가들에 비하면 푸슈킨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창의성 측면에서도 푸슈킨은 대단치 않게 보인다. 예를 들어 보자.
그의 서정시들은 대부분 서유럽 낭만주의 시들을 토대로 쓴 것이다.
사랑,이별,죽음 등 낭만주의 시대 시인이라면 누구나 다루었던 주제를 가지고 푸슈킨도 썼다.
또 서사시만 하더라도 푸슈킨의 독자적인 작품이라기보다는 영국 시인 바이런의 모방작처럼 보인다.
그의 유명한 드라마 '보리스 고두노프' 또한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를 소위 '벤치마킹'해서 쓴 것이다.
요컨대 푸슈킨에게서 기발한 아이디어나 역발상이나 심오한 예술성 같은 것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 내기 어렵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푸슈킨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
즉 기존에 존재하는 문학 작품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냈다는 데 있다.
푸슈킨의 주제와 형식과 내용은 모두 다른 나라 문학,옛날 문학,다른 작가의 문학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는 이 모든 '남의 것'들을 조금씩 뒤틀고 변형시키고 보완하여 '나의 것'으로 다시 만들어 냈다.
그의 천재성은 다름 아닌 모방을 재생산으로,그리고 재생산을 창조로 전변(轉變)시키는 능력이었던 것이다.
이 '다시 만들기'의 과정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독서와 습작이다. 푸슈킨은 독서광이었다.
그는 그리스 · 로마 고전에서부터 단테,셰익스피어,바이런,괴테,실러에 이르기까지
세계 문학의 거장들을 탐독했다. 그는 '새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있는 것'을 게걸스럽게 들이마신 것이다.
게다가 푸슈킨은 그 누구보다도 많이 원고를 고쳐 쓴 작가였다. 푸슈킨의 작품들은 모두 쉽고 단순하고 소박하다.
마치 영감에 가득 찬 작가가 순식간에 휘갈겨 쓴 것처럼 보일 때도 많다.
그러나 그의 유품을 정리했던 동료 작가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작품 치고 단숨에 씌어진 것은 단 한 편도 없다고 한다.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시행 하나도 수십 번에 걸쳐 다듬어졌다는 것이다.
천재 작가의 이미지 뒤편에는 독서와 습작으로 밤을 지새우는 노력가의 모습이 존재했던 것이다.
21세기는 창의성의 시대다. 많은 기업들이 지식보다는 창의성과 상상력을 갖춘 인재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창의성은 어디에서 습득할 것인가.
우리는 흔히 창의성 하면 무언가 엄청난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타고난 몇몇 천재들을 제외한다면
많은 경우 창의성은 '남의 것'을 속속들이 파악하여 그것을 '나의 것'으로 재창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창의성은 하루아침에 맨땅에서 피어나는 꽃 같은 것이 아니다.
개인의 창의성도 그렇고 한 집단의 창의성도 그렇다.
석영중 < 고려대 노문과 교수 > 2009-04-11 한국경제신문
(원문보기)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041053431&intyp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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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어찌보면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상당히 쉽다.
하지만, 계속 만들어내는 것은 확실하게 어려운 일이다.
미술가들이 그렸던 그림을 계속 반복해서 그리고, 음악가들이 예전 곡들을 계속 연습하는 것은
괜한 일이 아니다. 고전으로 불리우는 것들을 계속 연습하고 약간씩 변형해 나가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사람들이 난긴 작품들로부터 많은 것을 습득해나가며
거기에 자신의 색깔, 향기를 입히는 것이 작가가 아닌가 싶다.
물론 거기에 천재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끝없이', '계속해서' 라는 표현이 붙어야 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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