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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름 : 학문의 즐거움
지은이 : 히로나카 헤이스케
옮긴이 : 방승양
출판사 : 김영사
200여 페이지정도되는 얇은 책에 왜 이렇게 좋은 말들이 많이 있는지...
강연을 들을 때나 좋은 책을 볼 때면 느끼는 것인데,
그것은 말을 하는 사람의 인생이 녹아 있는 이야기는 더 잘 와닿는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 무엇에 집중을 하고 열정을 쏟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나는 그동안 '그 무엇'에 나의 열정과 인생을 쏟아 부을까? 하는 바보같은 고민을 해왔다.
물론 그 고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잘못은 바로 고민만 하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밥만먹고 잠만 자는 그런 생활은 아니였지만,
'음... 내가 지금하는 것이 내 꿈과 상관없는 것이면 소용이 없을 텐데...' 하며 일에 몰두하지 않았던 것말이다.
공부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나중에 다 까먹을 것들... 지금 열심히 공부해서 뭐 하나?' 라는 생각으로 집중하지 않았던 지나간 시간들...
깊이 반성하고 자성하는 시간이였다.
이 눈물이 씨앗이 되어 Joy of Learning 이라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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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두뇌는 과거에 습득한 것의 극히 일부밖에 기억해 내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왜 사람은 고생해서 배우고, 지식을 얻으려고 하는가?
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다. 배워 나가는 과정에서 지혜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지혜가 만들어지는 한, 배운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결코 손해마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일단 잊어버린 것을 필요에 의해 다시 한 번 꺼내려고 할 때,
전혀 배워 본 적도 없고 들어 본 경험도 없는 사람과는 달리, 최소한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고,
어느 정도 시간을 들이면 별 고생 없이 그것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혜에는 그런 측면이 있다.
나는 그것을 '지혜의 넓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지혜에는 대상을 깊이 살펴보는 '깊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결단력을 유도하는 '힘'이라는 측면도 있다.
'창조하는 인생이야 말로 최고의 인생이다' 그러면 창조란 무엇인가? 창조에 있어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창조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창조의 기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의 기쁨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만큼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나는 창조의 기쁨 중의 하나는 자기 속에 잠자고 있던,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재능이나 자질을 찾아내는 기쁨,
즉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서는 나 자신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기쁨이라고 말하고 싶다.
'산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벌어서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자기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또는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 등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런 태도야말로 인간의 가치이며 힘이라는 인생관을 아버지는 생활의 위기를 통해 스스로 보여주신 것이다.
어머니는 소위 말하는 인텔리와는 거리가 먼 분이시다. ... 나의 여러가지 질문에 어머니는 명확하게 대답을 할 수가 없으셨다.
그러나 '모르겠다'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으셨다. '그런 시시한 건 생각하지 않아도 돼' 라면서 화를 내는 일도 없으셨다.
'글쎄 왜 그럴까?' 어머니가 머리를 갸우뚱하시면 나는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요?' '커서 공부하면 알 수 있을 거야' 라고 하면서 어머니는 같이 생각해 주셨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 얻은 지식을 대학에 들어가서 잊어버리거나, 대학에서 배운 것을 취직하고 나면 잊어버리는 경우 등일 것이다. 또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힘들게 공부한 지식이 자격증을 따자마자 잊혀진다든가 하는 일도 망각의 단점으로 나타난 예이다.
여기에서, 열심히 공부해도 결국 잊어버리게 되는 것을 왜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문제가 나오게된다.
나는 그러한 질문을 하는 학생들에게 '그것은 지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닐까?' 라고 대답할 것이다.
즉 공부하는 과정에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지혜라는 것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지혜가 만들어지는 한 공부한 것을 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는 여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배우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그러므로 많이 배우고 많이 잊어버리고, 다시 많이 배우라고 말하고 싶다.
이 문제는 삼각함수를 쓰면 쉽게 풀 수 있지만 당시는 삼각함수를 배우기 전이었으므로 내게는 난제 중의 난제였다.
난 2주일 동안 다른 공부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안혹, 밥 먹을 때나 화장실에 갈 때나 이 문제를 푸는 데만 열중했다.
결국은 서너 가지의 경우로 나누어 증명할 수가 있었다. 이때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것만 생각하다가,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혀서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나에게는 대단히 귀중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이상에서 내가 수학을 전공하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말했다.
이처럼 나는 수학이라는 학문을 알게 되자마자 수학자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수학을 좋아하고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수학자로서 살아가려고 결심하기까지는 시행착오를 여러번 되풀이했다.
보통사람의 인생은 직선적이 아니고 우여곡절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되풀이되는 시행착오는 절대로 낭비가 아니다.
예컨대 기타 연주자를 지망하는 사람이 기타를 배운 지 얼마 안 되어 명기타 연주자의 연주를 들었다고 하자.
당장은 그 기타 연주자의 아름다운 연주에 심취하여 감동하지만, 막상 현실로 되돌아오면 자기가 기타를 연주한다는 것이
바보스럽게 느껴지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 연주가의 기술이 너무나도 뛰어나서 자기가 지금부터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내가 논문을 쓸 수 없었던 이유도 이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논문을 씀으로써 자기의 이론을 창조해 가지 않으면 수학자로의 길이 막힌다. 써야 하나, 쓰지 말아야 하나?
나는 계속 고민했다. ... 자기의 이론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논문을 써야 한다. 아무리 형편 없는 것일지라도.
실제로 나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렇다 할 업적을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람을
수학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 세계에서 많이 보아 왔다.
창조의 여행을 떠날 계기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그 계기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잡느냐 놓치느냐는 그 사람이 창조라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고민했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정치가이자 과학자인 프랭클린은 어느날 또 하나의 발명을 하여 친구 집에 뛰어가 자랑스럽게 그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계속되는 그의 발명에 약간 싫증이 난 친구는 '도대체 그렇게 유치한 것을 만드는 게 뭐가 대단하며,
무슨 소용이 있나?' 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랭클린은 옆에 누워 있던 갓난아이를 가리키며 이렇게 반문하였다.
'그렇다면 이 아기는 무슨 쓸 데가 있는가?' 프랭클린의 이 말은 중요한 것을 시사하고 있다.
창조라는 것은 출발점에서는 모두 유치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의 원형은 아기와 같고 그것이 충분히 성장해야만 비로소 이용 가치가 밝혀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하버드 대학 시절의 멈퍼드와 아틴이 그랬다.
그런 우수한 사람들을 일일이 질투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 그러한 영재들에게 얻어맞거나,
그들이 나와는 상대가 안 될 정도의 재능을 보였을 때 나는 혼자 이 노래를 부르면서 체념하곤 했다.
체념한다고 해서 모두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 목표를 확실히 잡으면서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질투심이 안 생긴다. 그리고 남을 질투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기의 정신 에너지가 조금도 소모되는 일이 없고
판단력도 둔해지지 않는다. 결국 그것이 창조로 이어져 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경우에 부딪칠 때마다 그 아이의 명언을 소리내어 말해본다. '난 바보니까요' 그러면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다.
눈앞이 밝아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어차피 나는 바보니까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바보다'라고 자기 자신을 바로잡음으로써 경직된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우수한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성공 경험만을 쌓아서는 안 된다.
때로는 성공에 필요한 만큼 노력을 했는데도 실패하는 경험을 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창조의 본질도, 창조의 구체적인 방법도, 또 그 바탕이 되는 핵심도 천재가 아닌 우리로서는
실패를 통하여 몸소 터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패를 통하여 터득한 노하우를 가지고, 보다 좋은 창조에 도전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는 전혀 없다. 자기 자신의 목표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친구가 어떤 과목을 어느 정도까지 공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보다 공부가 앞서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친구도 몇 명 있었지만, 그것도 신경 써 보아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에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직선적으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하는 태도는 성의 주변을 포위해서 단숨에 쳐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 자세로는 난공불락의 성을 공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분석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문제를 조각조각 해체하여 하나하나를 자세히 보고,
마치 무장이 바늘 구멍만큼의 돌파구를 찾듯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천재란 연구대상인 문제와 자기 자신이라는 그 두 가지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일체가 되는 사람이다' 라고
한 물리학자가 말했는 데 수긍이 가는 말이다.
그로센딕이 수학에 거는 집념이나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집념이나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그의 연구 자세를 보면서 아마도 그것은 그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역경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로센딕에게서 특별히 고생했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니다. 그런 말을 할 사람도 아니었고,
설령 내가 들었다고 하더라도 수용소에서 단신으로 프랑스로 도망처 국적도 없이 외곬으로 수학 인생을 살아온,
그의 가혹한 고투의 역사를 직접 느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자기 장래를 결정하려고 할 때에 쓸 수 있는 여러 가지 정보가 있다.
예컨대 '성적이 이 정도니까 저 대학의이러한 학과에 진학하자'라든지, '이러한 직종이 유망하니까, 이 기업에 취직하자' 라는 식으로 여러 가지 정보로부터 필요를 도출해서 진로를 결정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 장래를 결정한 사람은 결정한 것이 욕망으로 바뀌지 않는 한 어디에서인가 좌절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학문을 하고 싶다' '나는 이 일에 종사하고 싶다'라는 욕망이 있어야 한다.
나는 그 후 수개월에 걸쳐 노력해 보았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무렵 하버드 대학의 보트 교수가 했다는 말 한마디가 인상깊게 들려 왔다.
'문제와 함께 잠자라(Sleep with problem)' 어려운 문제를 풀려고 할 때 그 문제와 함께 생활하는 자세를 가지라는 뜻이다.
느긋하게 기다리고 기화를 잡을 행운이 오면 나머지는 끈기이다. 나는 남보다 두 배의 시간을 들이는 것을 신조로 하고 있다.
그리고 끝까지 해내는 끈기를 의식적으로 키워 왔다.
끝까지 해내지 않으면 그 과정이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두뇌가 우수하더라도 업적을 쌓지 않으면 수학자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노력이란 말은 나에게는 남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일본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좋은 질문'과 '시시한 질문'을 구별하고, 실제로 답을 알면서도 자기 재능이나 발상을
과시하기 위하여 질문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 사람들은 좋은 질문이나 시시한 질문에 상관없이
모르는 것은 무엇이든지 질문하고 할 수만 있다면 질문만으로 다 배워 보겠다는 자세가 있다.
자기 나름대로 보람을 창조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 속에 잠자는 가능성을 찾아내야만 한다.
아무리 어렵고 고생이 뒤따른다 할지라도 시대를 살아나가기 위하여는 그것이 필요하다.
글쓴시간 : 03/04/10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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