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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름 : 게임, 세계를 혁명하는 힘
지은이 : 박상우
펴낸곳 : 씨엔씨미디어
책을 처음 펼쳤을 때는 그냥 '이런 저런 게임이 있었다~~~' 라는 식의 설명서인줄 알았다.
그런데, 계속 책을 읽으면서 '게임은 아직도 공부안하는 얘들만 가지고 노는 놀이기구'라는 생각을 완전히 떨쳐버리게 되었다.
나도 몇몇 게임에 미치다시피 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까지 게임이 우리 현실에 차지하는 비중이 큰지 몰랐다.
어느정도 까지냐구?
이 책이 바로 그 답이다.
게임은 세상을 혁명하는 힘이 아니라 벌써 세상을 바꾸어 놓은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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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변화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인가? 그렇지 않다.
게임을 하면서 경험하는 새로운 세계가 주는 즐거움은 현실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다.
자신의 현실에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게임 세계는 아무도 차별하지 않는다.
어느 곳을 선택해야 할지는 분명하다. 즐거움도 주지 못하는 주제에 단지 현실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택받을 권리는 없다.
게임의 사회적 악영향, 사이버 스페이스의 폐해. 가상 현실은 현실과 비교하면 한줌의 가치도 없는 것일까?
그것이 주는 행복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게임을 통해 현실 도피를 꾀하는 건 고생 않고 자란 나약한 요즘 젊은이들의 추태인가?
마지막으로 묻겠다.
현실 도피란 반드시 비난받아야 할 것인가?
번듯한 대학을 나와서 남들이 선망하는 직장에 들어가고 유학까지 마친 후 억대 연봉을 넘보려는
진취적이고 건실한 청년 역시 그의 현실에서 도망쳐 새로운 삶을 가려는 게 아닌가?
대학에서, 공장에서, 심지어 기존 정치판에서 혁명이나 개혁 같은 걸 꿈꾸는 사람들은
지금의 체제, 자본주의 체제를 벗어나서 새로운 곳으로 가고 싶어하는 것 아닌가?
그런 것들에 '도피'란 꼬리표를 붙이는 건 형용모순일까?
일인칭 슈팅은 인간의 감정을 직접 게임에 끌어들인다. 일인칭 시점은 매우 불안한 경험이다.
바로 눈앞말고는 좌나 우 또는 뒤쪽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공포를 느낀다.
일인칭 슈팅에서 사용되는 귀가 찢어질 듯한 메탈음악과 소음에 가까운 음향효과 역시 공포감을 증폭시키는 데 일조한다.
공포감이 극에 달할 때, 사람들은 공포감과 더불어 다른 새로운 감정을 느낀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깨달음. 그리고 이 깨달음이 가져다 주는 수치심.
그래서 공포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부끄러움도 커지게 된다.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수치심이 커지면,
더이상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 그것에 대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 분노는 공포의 대상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이 두려움을 극복했다는 사실을
남들과 자시자신에게 과시할 때에야 비로소 사라진다.
더욱이 무기가 엄청나서 적의 몸뚱어리가 더 잘게 산산조각 나면 날수록 분노는 더 효과적으로 사라진다.
도취에 흠씬 젖어 도저히 누리지 못할 것 같은 것을 누리고, 차마 보지 못할 것 같은 것을 보고,
도저히 상상조차 가능하지 않던 것을 상상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진리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인가?
[에로티즘] 죠르쥬 바따이유
하지만, 게임이란 옆에서 봐서 재미있는게 아니라 플레이해서 재미있어야 한다.
물론 이런 자폐성의 즐거움을 '현실도피'라고 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에도 말했듯이 자신이 현실로 느끼는 것만이 진정한 현실이다.
원하지 않는 현실을 피해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만들어낸다고 해서 그것이 도피일까?
비록 다른 사람과 나눌 수는 없을지라도 게임을 통해 주어진 왕국에서 컴퓨터와 게이머 간의 순환이 그것대로 완결된다면,
이 현실은 게이머 자신에게는 가장 바람직한, 가장 완벽한 현실이 되는 것 아닐까?
그러기에 무엇이 현실 도피이고 무엇이 현실적 인생인지에 대해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 선택은 오직 현실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문제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언제나 행복한 현실을 경험할 수 있는 무한한 즐거움의 왕국을 소유한 게이머들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사람에게 시간은 자신의 외부에서 발생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중요한 건 '일반적인' 시간이나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다.
공간이 지배적 사회규범이나 사회 관습에 따라서 자신의 얼굴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도 구체적 기호론화 작용에 의해서 새겨진다. -[기계상무의식] 펠릭스 가따리
게임세계처럼 복잡한 미로가 얽혀 있는 곳도 드물다.
80퍼센트의 쓰레기를 제외하더라도 남은 20퍼센트만 가지고도 충분히 방대한 양이다.
그중 어느 곳으로 갈지를 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에 대해 알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이해 관계와 예의범절에서 벗어나, 지금 진짜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자.
이런 걸 좋아하면 남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따위는 벗어버리자.
세상이 요구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자신을 찾아야 탐색에 성곡하고, 즐거운 게임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처음 게임을 즐기던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왜 게임을 할까?
게임은 상처입고 지친 우리를 감싸안아 무자비한 현실로부터 탈출시킨다.
게임 세계에서는 서로를 상처입히고 쓰러뜨리며 살아갈 필요가 없다.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원하는 것을 이루며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창조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끼고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창조적 성취감이 부정적 성취감으로, 그리고 숫자에 대한 편집증으로 바뀌는 순간 자유는 사라진다.
이제 게임 세계는 현실과 다름없는 아귀의 세계로 바뀐다.
더 큰 숫자에 대한 허기짐만이 존재하며 즐거움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또 다른 세상은 무너지고 게임 세계에서도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60년대 미국의 농부들은 꽃이나 꽂고 있는 무기력한 히피에게 총을 쏘았다.
'90년대 한국의 운전자들은 오토바이를 탄 폭주족을 차로 밀어붙인다.
그들이 자기의 삶에 현실적인 위협이 돼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들이 상징하고 있는 게 자신의 현실을 파괴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이 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 하나의 허구적 이미지, 어떤 의미도 없는 가공의 이미지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 그건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임세계로의 이주민들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 일궈낸 현실이 선 몇 개로 이루어진 흉측한 다마고치의 '똥치우기'보다 못하다는 주장에
불쾌해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사회와 나라의 발전을 위해 뛰어야 하는 지금,
근무 시간에 몰래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동료도 기분 나쁘다.
혁명으로 노동 해방을 성취해야 하는 판에 컴퓨터에 만들어진 가상 도시나 가상 국가를 보면서
즐거워하는 친구에게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모두는 그동안 바친 수만은 시간과 노력과 정열들을 하나의 웃음거리, 한 편의 코미디로 만든다.
그들은 분노한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해진다.
혹시 정말 웃음거리 아니었을까? 내가 한 일이 정말 내가 꿈꾸던 일들일까?
글쓴시간 : 01/06/2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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