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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의 신화]부조리한 사회에 행복한 시지프

by 202020 2009.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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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름 : 시지프의 신화
지은이 : 알베르 카뮈
옮긴이 : 오현우, 홍순민
출판사 : 일신사


이 세상의 부조리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틀린 것이다. 나는 이 세상 자체가 부조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래 부조리인 것이므로
'도대체 이놈의 세상이 어째서 이 모양 이 꼴이냐?' 라는 생각은 그저 하소연이나 푸념의 말일 뿐이다.

중학생때 친구들과 비가 와서 운동장 상태가 너무 안 좋은 때를 빼고는 매일 농구를 했다. 눈이 왔을 때도 했고,
농구하다가 다리가 부러져서 기브스를 했을 때에도 쉬지 않았다. 그때는 농구에 미쳤었다. 잘 때도 농구하는 꿈을 꿨고,
매일 방과 후에 '이번에는 어떻게 팀을 짜서 시합을 할까?' 라는 생각만 하고 살았다.
그런데, 항상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왜 나보다 농구를 덜 좋아하고 연습을 덜 하는 친구가 항상 이기는가?
어떻게 나보다 노력을 더하지 않았으면서 나보다 슛을 더 잘 쏘나?'
농구를 잘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내 기준으로 볼 때, 나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맨날 그 친구에게 졌다. 왜 그럴까?

TV 에서 하는 농구 시합을 볼 때에도 궁금했었다. '모두들 똑같이 운동하고 연습하는 데 왜 어떤 선수만 특출나게 잘 할까?'
남보다 더 열심히 훈련했기 때문에… 라는 대답은 아마 틀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선수보다 더 많이 열심히 훈련했던 선수들이 있었을 테니까… 분명히 말이다.

원래 날 때부터 타고난 것 때문인가? 아니면 그 사람에게는 그런 운명이 정해졌기 때문인가? 만약에 원래
그렇게 정해진 것이라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은 다 쓸모없는 것 아닌가?
'농구는 나에게 맞지 않는 것 같애' 라고 위안을 삼고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을 알고 있는 것이 좋지 않은가?

열심히 훈련했는 데 막상 시합에서는 기대한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때, 나보다 덜 노력한 사람이 더욱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을 때 나는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부조리'라는 단어보다는
'불공평'이라는 말을 썼던 것 같다.

나이를 점점 먹어간 후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은 정말 부조리한 것임을 매일 매 순간 느낀다.
매일 매일 피땀을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지고, 약삭빠르게 자기 몫을 챙기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교활하고 뻔뻔하게 사는 사람들은 부와 명예, 권력을 쥐고 세상을 즐기며 살고 있다.
(여기서 나는 후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나 또한 후자에 속하며 그 사실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까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조리의 인간이란 사실 무엇인가? 영원을 부정하지 않고 영원을 위하여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다.
하긴 그렇다. 왜 사는지에 대해서, 자신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사후 세계에 대해서 고민하고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단 말인가? 사실 우리가 매일 하는 '뭘 입을까? 뭘 먹을까' 에 대한 고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이 아닌가?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하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는 목숨을 걸고, 정작 중요한 원리나 문제에 대해서는 그냥 회피한다.

사람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려고 하며 인생의 모든 노력과 행복은 돈을 벌기 위하여 집중된다.
행복은 잊어지고 수단이 목적으로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다. 인간보다도 돈이 중요해지는, 오로지 목적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인간은
돈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이용당하고 있다. 그런 이 부조리한 사회에서 우리는 생각없이 그냥 살아야만 하는가?
우리 선배들이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이 부조리한 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잠시의 몸부림이라도 쳐야하는가?
인간의 일생의 절반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얼굴을 돌이키고 입을 다물고 보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배우는 침입자이다. 그는 속박당한 영혼의 요술을 해제하고 드디어는 온갖 정열이 무대 위에 달려들게 된다.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무대라는 새로운 사회 공간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들어가 다른 사람으로 다른 사회로
경험을 해 보는 것이 진정 이 부조리한 사회를 이겨내기 위한 근본적 해결책일 수는 없다.
말도 안되는 부조리한 사회를 벗어날 수 없는 말도 안되는 방법일 뿐이다. 물론 잠시의 위안과 위로는 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이 모든 문제는 종교로 해결될 수 있을까?
그는 신은 필요한 것이며 신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각자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며 인간의 인장을 가지고
세계를 아로 새기는 것이다. 고양이의 우주는 까치의 우주가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각자의 세계를 살고 있는데,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그나마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체에 대한 해답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부조리하고 불공평할 수 밖에 없지만,
각자 나름의 해답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오늘날의 노동자들은 그 생애의 그날 그날을 같은 일에 종사하며 그 운명은 시지프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노동자들은 그들이 의식하는 그 드문 순간에 있어서만 비극적인 것이다.
신들의 푸롤레타리아이며 무력하면서도 반항적인 시지프는 자기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그가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비참한 조건이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었던 시지프, 그처럼 우리도 이 사회의 부조리를 알고 있어야 하며 그 알고 있는 것이
부조리를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우리에게 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행복에의 안내서를 쓰려는 노력 없이는 부조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뭐라구! 그렇게 좁은 길로 통해야 한다구!'
그러나 세계는 하나 밖에 없다. 행복과 부조리는 동일한 대지 안에서 태어난 두 아들이다.

어떻게든 부조리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시지프나 까뮈를 몰라도 살아야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이자 권리이고 그런 것들이 아니여도… 난 죽기 싫다!
그럼, 선택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선택하기 전에 충분히 심사숙고하고 선택한 후에도 계속 고민하고 행동해야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부조리한 사회를 고치기 위해 내 인생을 바쳐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무난하게 남들하는 데로
'넓은 길'로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시지프처럼 돌을 올렸다가 다시 떨어지면 내려와서 다시 올리는
반복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가?

나는 이러한 질문들을 계속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낸다.
산꼭대기로 향하는 그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 속에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도 부조리한 사회를 계속 살아가며 또 후손에게 물려주면서 그 어떤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
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 누가 뭐라해도 나는 '유동길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 세계에서 부조리는 피할 수 없지만, 내가 정한 곳을 향해 쉬지않고 나아가는 것을 단 하나의 만족으로 하는
행복한 시지프가 되고 싶다.

 글쓴시간 : 200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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