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제목 : 적도를 달리는 남자
지은이 : 김형준
출판사 : 이매진
p78
(외국어를 사용함에 있어) 중요한 점은 의사소통이지 품위 있는 언어 사용이 아니라는 것이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다.
p84
나는 인도네시아어에 완전히 '잠기게 되는', '빠져들게 되는', '몰입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생존하려면, 조사를 진행하려면 언어를 배워야 했다. 또한 그 언어에 하루, 일주일, 한 달의 시간 전부가 노출됐다.
p97
영어에 주눅 들어 있었다면, 더 정확한 언어 사용 능력을 체득하려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더라면 논문 작성 기간이 훨씬 연장됐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내용이 더 중요하고 그 표현은 이차적인 문제라 생각했다.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은 많으며 이들의 도움을 통해 문법에 맞는 품위 있는 언어로 포장하면 되니까. ... 언어를 대하는 태도, 특히 영어라는 외국어를 대하는 태도의 전환이 요구된다. 우리가 영어를 못하는 것을 크게 창피해야 할 필요가 없다. 마치 인도네시아어를 못하는 것에서 쉽게 창피함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단 네 마디 말을 하고 나서도 '인도네시아어를 참 잘하네요!'라는 칭찬을 듣는 것이 이곳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처럼.
p130
자바 사람의 사회문화적 특질 (김형준, 2008)
Rukun 표면적 화합
- 사회적 태도 : 불간섭, 우회적 표현
- 개인적 태도 : 품위 있는 행동, 감정 통제, 표리부동 인정
- 사회적 기제 : 호혜적 교환, 협의와 합의
- 정교적 태도 : 호혜적 의례, 상대주의
p133
한국식 기준으로 본다면, 이곳의 사회관계에는 뭔가 '찐한' 모습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마음에 있는 말을 하지 않는 상황은 넘을 수 없는 벽이 놓여 있다는 느낌을 가져다주며, 만나는 사람 대다수와 이런 관계를 맺게 되면 뭔가 답답하고 허전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은 때로 참기 힘들 정도까지 나아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서 인간관계 형성이나 유지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곳 사람하고의 관계 맺기는 상당히 용이한 편에 속하며, 큰 어려움없이 유지해나갈 수도 있다. 이곳 사람의 낙천적 성향 때문인데, 진실한 감정의 표현이 억제되는 대신 웃음과 여유로움이 일상 상호작용을 채우고 있다.
p134
이곳에서 삶의 이상적 모습으로 거론되는 스라맛(selamat) 상태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이 개념은 '주변의 일이 예측된 방식대로 흘러가서 돌발적인 사건이 생기지 않는 상태' 또는 '어제의 상태가 오늘에도 그대로 지속됨'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더 가까워지지도 않고 더 멀어지지도 않는 관계의 지속'을 지시한다. 감정적 거리를 가깝게 할 필요가 없다고 인정할 경우 인간관계에서 크게 슬퍼할, 실망할, 괴로워할, 애태울, 즐거워할 일도 그리 많지 않은, 밋밋하지만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내 맘 같지 않아서'라는 이유로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내 맘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없다고 인정하면 사라질 수 있다.
p142
흥미로운 점은 체류 기간에 따라 평가 방식에도 일정한 경향성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단기간 체류한 사람은 칭찬 일색이라 할 정도로 이곳 사람에 관해 좋은 평가를 내린다. 이삼 년 살아본 사람의 경우 평가는 더 조심스러워지며 원론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오랜 기간을 산 사람은 부정적 경향을 더 많이, 그리고 강하게 표출한다. 이들의 견해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은 이곳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점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곳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조언이 보통 추가된다.
p191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대답해주려는 이유로는 '마음이 편치 않아서'라는 표현이 주로 거론됐다.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질문한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거나 실망시킬 수 있고 또한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가 배어 있는 행동이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타인을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만들 수 있는 행동이기도 했다.
p224
약식 금식을 하며 얻은 결론 중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금식은 개인의 자의식을 최대한 고양할 수 있는 기회다. 금식은 자기 자신과 주변을 뒤돌아보고, 나아가 신에 관해 생각할 기회를 자연스럽게 제공해준다.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인지, 하루 종일 금식을 하는 마을 사람이 존경스러워 보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보통 사람이지만, 하루 종일 굶으며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가 설정한 목표를 성취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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