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무정
지은이 : 이광수
고등학생때, 수능을 준비하면서 문제집으로 접했던 신소설 무정.
기억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 소설이였던 것 같은데, 그 외에는 읽기전까지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물론 이렇게 재미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나만 재미있게 본 듯 하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친구들은 다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소설'이라는 점과 그 때 당시 시대배경을 고려해서 소설을 읽으면
전혀 재미있지 않으며 특히 친일파로 알려진 이광수의 선입견때문에 이 작품을 더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난 소설을 읽을 때 시대배경과 작가의 배경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일부러 그렇게 나에게 그 이야기 자체에만 집중하라는 자기 최면을 걸 정도이다.
그런 책읽기방법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예전부터 나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이 소설이 재미있었던 것은 주인공 이형식의 생각을 많이 공감할 수 있어서였다.
물론 지금의 젊은 남자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아마도 대부분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는
주인공과 같은 생각을 많이 했을 것이다. 나또한 형식의 우유부단함을 보면서 나를 보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 였다.
이야기가 점점 진행되어가며 너무하는 듯한 우연의 연속으로 나중에
네명의 남녀(우선을 포함하면 다섯명)가 모였을 때는 방학때 봤던 복잡한 아침드라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끝은 좀 허무했다. 그 동안의 잘잘못을 따지든가 아니면 형식에게 약간이라도 잘못의 댓가를 치르게 했으면
하는 생각때문이다. 남녀간의 복잡한 사랑이 우리 나라를 위한 계몽사상으로 끝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한 것 같다.
백년 전 사람들이나 오백년 전 사람들이나 다 나처럼 생각하고 살았다고 상상해보니 가만히 있다가도 웃음이 나온다.
내가 형식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물론 난 형식보다는 우선에 가까운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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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것은, 가슴속에 이상한 불길이 일어남이니, 이는 청년 남녀가 가까이 접할 때에
마치 음전과 양전이 가까워지기가 무섭게 서로 감응하여 불꽃을 날리는 것과 같이 면치 못할 일이며,
하늘이 만물을 내실 때에 정한 일이라. 다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도덕과 수양의 힘으로 제어할 뿐이다.
형식은 영채의 말을 듣고 얼마큼 안심이 되었다. 영채의 얼굴을 다시금 보매,
새삼스럽게 정다운 마음과 사랑스러운 생각이 난다. 지금까지 영채의 절행을 의심하던 것이 죄송스럽다 하였다.
영채는 어디까지든지 옥과 같이 깨끗하고 눈과 같이 깨꿋하다 하였다.
이전 안주에 있을 때에 보던 어리고 아리따운 영채의 모양이 뚜렷이 형식의 앞에 보이더니,
그 아리따운 모양이 방금 그 앞에 앉아 신세 타령을 하는 영채와 하나이 되고 만다. 형식은 생각하였다.
옳다. 은혜 많은 내 선생님의 뜻을 이어 영채와 부부가 되어 일생을 즐겁게 지내리라 하였다.
이 세사람의 가슴은 마치 장차 오려는 폭풍을 기다리는 바다와 같다.
지금은 물결도 없고 거품도 없고 흐름도 없는 편편한 바다다.
이제 하늘로서 큰 바람이 내려와 이 바다의 물을 온통 흔들어 거기 물결을 만들고 거품을 만들고 흐름을 만들지니,
그때야말로 비로소 참바다가 되리로다. 모르네라. 그 바람이 무엇이며 그 바람을 보내는 자가 누구뇨.
지금 형식의 가슴에는 이 바람이 불어오려는 전조로 이상항 구름장이 하늘가에 배회한다.
형식은 기쁨을 못 이기는 듯, '무궁한 시간의 일점과 무궁한 공간의 일점을 점령항 인생에게 큰일이라면 얼마나 크고,
괴로운 일이라면 얼마나 괴로우랴' 하였다. 그리고 한 번 다시 하늘을 우러러보고 고개를 숙여 기도를 올렸다.
영채가 기생 월향일 때에는 기생이니까 정절을 깨뜨려도 상관이 없고, 월향이가 영채가 된 뒤에는 기생이 아니니까
정절이 지킴이 마땅하다 - 이것이 분명한 모순이언마는 우선은 그런 줄을 모른다.
우선의 생각을 넓히면 '열녀는 열녀니까 정절을 깨뜨림이 죄어니와, 열녀 아닌 여자는 열녀가 아니니까
정절을 깨뜨려도 죄가 아니다' 함과 같다. 그러면 이는 선후를 전도함이니,
열녀이니까 정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정절을 지키니까 열녀여늘,
우선의 생각에는 열녀면 정절을 지킬 것이로되, 열녀가 아니면 정절을 지키지 아니하여도 좋다 함이다.
형식은 생각하기를 자기의 일생에 그렇게 미묘하고 자릿자릿한 쾌미를 깨닫기는 처음이라 하였다.
그 어린 기생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광선을 발하여 사람의 정신을 황홀하게 하고,
그 살에서는 알 수 없는 미묘한 분자가 뛰어나와 사람의 근육을 자깃자릿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형식은 선형을 생각하고, 일전 선형과 마주앉았을 때에 깨닫던 즐거움을 생각하고,
또 자기가 희경을 대할 때마다 맛보던 달콤한 맛과 기타 정다운 친구를 대할 때에 맛보던 즐거움을 생각하고,
또 차 속이나 배 속이나 처음 보는 사람 중에도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주는 자가 있음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즐거움 중에 그 어린 기생이 주는 듯한 즐거움은 처음 본다 하였다.
교사들은 대개 될 대로 다 된 작은 인물같이 보고, 자기는 무한히 크게 될 가능성이 있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나 희경은 형식도 6,7년 전에는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것을 모른다.
희경이 보기에 형식은 본래 그릇이 작아서 높이 뛸 줄을 모르고, 4년이 넘도록 중학교 교사로 있고,
또 일생을 중학교 교사로 지내는 것같이 보여서 일변 형식을 경멸하는 생각도 나고 일변 불쌍히도 여긴다.
형식은 정신없이 집에 돌아왔다. 노파가 웃통을 벗고 마루에 앉아서 담배를 먹는다.
어깨와 팔굽이에 뼈가 울퉁불퉁 나오고 주름잡힌 두 젖이 말라 붙은 듯이 가슴에 착 달라붙었다.
귀밑으로 흘러내는 두어 줄기 땀이 마치 그의 살이 썩어서 흐르는 송장물 같은 감각을 준다.
반이나 세고 몇 올이 아니 남은 머리터럭과, 주름잡히고 움쑥 들어간 두 뺨과, 뜨거운 볕에 시든 풀잎과 같은
그 살과 허리를 구부리고 담배를 먹는 그 모양은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준다.
그도 일찍 여러 남자의 정신을 황홀하게 하던 젊은 미인이었었다.
왜 내게는 여자가 취할 만한 용모와 풍채가 없으며, 세상이 부러워하는 재산과 지위와 명예가 없는고 하여 본다.
평생에는 우습게 말도 하고 조롱도 하던 용모, 재산, 지위도 이러한 때를 당하여서는 몹시 부러워진다.
그래서 자기를 부귀한 집 도련님을 만들어보고 호화로운 미소년을 만들어보고 그러한 뒤에 선형을 자기의 앞에 놓아본다.
그래서 여자는 춘향을 부러워하고 남자는 이 도령을 부러워한다. 자기네가 실지로 그러한 사랑을 맛보지 못하매,
소설이나 연극이나 시에서 그것을 보고 좋아서 웃고 울고 한다.
조선서는 천지 개벽 이래로 오직 춘향, 이 도령의 사랑이 있었을 뿐이다.
저마다 춘향이 되려 하고, 이 도령이 되려 하건마는 다 그 곁에도 가보지 못하고 말았다.
조선의 흉악한 혼인제도는 수백 년래 사랑의 가슴속에 하늘에서 받아가지고 온 사랑의 씨를 다 말려 죽이고 말았다.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이 아니요, 무정하던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케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하는 '무정'을 마치자.
글쓴시간 : 03/03/26 18:46
취미. Hobby/책. Book & Writing
[무정]선형이냐, 영채냐... 아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공부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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