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동안 영하 10도의 혹한 속에 촬영이 마무리 되는 오늘은 켠이의 생일이다. 갑자기 혜진 누님의 긴급호출이 떨어졌다. 촬영이 끝나고 우리는 두일형이 미리 자리를 잡아둔 황학동 사거리의 곱창골목으로 부랴부랴 자리를 옮겼다. 자정이 지날 무렵 연기자들이 속속 도착하고 작가들도 갑작스런 호출에 입맛을 다시며 모여든다.
최고의 맛집 이라며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간 아줌마들이 싱싱한 소간과 천엽, 숭숭 썰어 가득담은 속이 꽉찬 곱창, 막창, 대창 전골 그릇을 들고 달려온다. 이렇게 해서 매서운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밤, 황학동 곱창집 옥탑 방에 켠이의 생일을 빙자한 우리 프란체 가족들의 느닷없는 번개 단합대회가 열렸다.
극중 프란체스카의 성격을 그대로 빼다 박은 혜진 누님은 연신 "야! 마셔"를 외쳐대며 좌중을 휘어잡고 그 곁에서 두일 형은 그 특유의 보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소주잔을 조용히 비운다. 술을 전혀 못하는 려원이는 반잔을 마시고 몸에 두드러기가 난다며 온갖 엄살을 피워대고 친구들의 빗발치는 항의전화에 쩔쩔 매면서도 켠이 녀석, 그리 싫지만은 않은 지 넙죽넙죽 주는 대로 잘도 받아 마신다. 올해 성인이 된 슬기는 처음으로 소주를 마셔보고는 왜 어른들이 이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며 한 잔씩 마실 때마다 온몸을 부르르 떨어댄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좀 더 허심탄회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선배연기자들은 후배 연기자들에게 칭찬과 조언을 아끼지 않고 때론 따끔한 질책도 서슴지 않는다. 후배 연기자들도 자신의 연기에 대한 고민과 시시콜콜한 인생 상담까지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연출자와 작가도 그동안의 고충이나 아쉬운 점을 풀어놓으며 한몫 거든다.
언젠가 <프렌즈>의 연출자 데이비드 크레인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에미상에 빛나는 미국 최고의 시트콤 <프렌즈>를 10년 동안 연출해온 그는 "나는 프렌즈를 연출하지 않았다. 그저 관객이 되어 그들의 연기를 구경했을 뿐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는 누구보다 연기자 전체의 팀워크를 강조했으며 촬영이 없을 때에도 연기자들끼리 여행을 떠나라고 적극 권했다고 한다.
실제로 <프렌즈>의 메이킹 필름을 보면 피자를 먹으며 지켜보는 관객들 앞에서 마치 뮤지컬처럼 라이브 연기를 펼치고 관객들이 웃지 않으면 즉석에서 연기자들과 연출자, 작가들이 둥그렇게 모여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짜내는 광경을 종종 볼 수가 있다. 그렇게 3번이상의 재녹화를 통해 주당 25분짜리 에피소드 하나를 방송한다. 그것도 6개월만 방송하고 나머지 6개월은 서로의 친목도모와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다. 이것이 시트콤 <프렌즈>가 10년이 넘게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이다. 그 주에 촬영해서 그 주에 방송을 내야하는 예능 프로듀서인 나에겐 이런 얘기는 정말 저 먼 달나라 얘기로 들린다. 하지만 이미 시청자의 눈이나 나나 <프렌즈> 만큼의 감동과 웃음의 경지를 요구한다. 나도 지고 싶진 않다. 적어도 흉내라도 내려고 매주 악에 받쳐 발버둥치고 있다.
다시 여기는 황학동 곱창집 4층 옥탑방...
잠깐 상념에 잠긴 사이, 혜진 누님은 켠과 연기 상담 중이고 두일 형은 슬기와 장난치고 있고, 려원이는 작가와 헤어스타일에 대해 논의 중이다. 내 눈앞에 있는 이들은 내가 머릿속에 5개월 동안 끙끙 거리며 생각해왔던 <프란체> 가족들이 더 이상 아니다.
그들은 이제 진짜 가족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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